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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산의 능선을 따라 안개가 걷히는 걸 보니 비는 이제 다 내렸나 봅니다. 다만 앞산에 걸린 먹구름은 약간의 미련이 남았는지 선뜻 걸음을 떼지 못한 채 슬몃 눈치를 살피면서 어슬렁어슬렁 속도를 늦추고 있지만 말입니다. 저 산 너머 구름이 향하는 곳 어디쯤에는 밀려온 구름에 더하여 또 다시 새로운 구름이 만들어지고 어두워진 구름을 뚫고 이따금 비도 내릴 테지만 자연의 품에 안겨 하루를 사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갑자기 푸근해지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 속에서 우리들 모두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해하는 투명인간 가족이 다리 너머에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투명인간들만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픔도 슬픔도 없이 모두가 평등한." (p.367)
성석제의 소설 <투명인간>을 읽었습니다. 읽었다기 보다는 읽어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름지기 소설이란 끊김 없이 쭉쭉 읽히는 맛에 읽는 것인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나는 마치 우리네 근현대사를 소설로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어쩔 수 없이 드는 지루함을 제어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그동안에 나는 <소울 푸드>나 <칼과 황홀>등 그가 쓴 산문집을 주로 읽었던 탓에 그의 소설만큼은 사전지식이 전무했었습니다. 산문집에서 간간이 보여지던 익살스러운 문체가 소설에서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게 내가 알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작품을 잘못 선택했던 것인지 이 소설은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진지해도 너무나 진지한 소설이었고 진땀을 빼며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은 5월의 마포대교에 등장한 투명인간으로 시작하여 이 책의 주인공인 김만수의 과거로 급하게 되돌려진다. 배 속에서 나올 때부터 '머리통만 절구통겉이 크고 팔다리는 쇠꼬챙이겉이 빌빌 돌아가는 탓에 지대로 커서 인간이 될랑가 걱정'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만수. 위로도 형과 누나들이 있고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던 만수네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하여 부모님과 만수를 비롯한 자식들이 3남 3녀로 오지 산골 개운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 낙동강 유역에서도 큰 큰 부잣집 삼대독자였던 할아버지가 독립군으로 낙인 찍혀 전 재산을 잃고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하여 찾아든 곳이 개운리였다.
기골이 장사 같고 공부 대신 노는 걸 좋아했던 만수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농사일에 매달려 화전을 일구고 가축을 길렀다. 한국전쟁 중에 만수의 형 백수가 태어났고 워낙 깊은 산중이라 전쟁이 났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지냈다. 세 살때부터 글을 배워 대여섯 살 무렵부터는 이런저런 일을 따지고 들었던 백수와는 달리 3남 3녀 중 네째로 태어난 만수는 모든 게 늦되기만 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도시에 나가 살았던 백수가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그 시기에 만수네 집도 시대의 조류에 급격하게 휘말린다.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던 백수는 피를 팔고 막노동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버티다가 결국에는 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에 파병된다. 가족을 위해 동생 금희에게 미싱을 사서 보내기도 했던 백수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자 만수의 할아버지는 개운리를 떠나라고 말한다. 변변한 직장도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누이들이 집안을 보살펴야 했고 아버지는 술로 나날을 보냈다. 변두리 단칸방 신세를 면키 어려웠던 그들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똑똑하던 명희 누나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하루 아침에 백치가 되고 만수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떠맡아 집안을 보살핀다.
고도성장을 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과는 반대로 만수네 가족은 하나둘 무너져만 간다. 맏이 백수가 죽고, 명희 누나가 백치가 되고, 만수를 형으로 대우하기는커녕 늘 무시하기만 했던 석수가 위장취업을 한 후 행방불명이 되고, 야학을 하던 막내동생 옥희마저 변변치 않은 건달과 결혼을 한다. 무너지고 부서지는 가족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은 어느것 하나 잘난 데 없었던 만수의 몫으로 남는다. 학수가 남긴 아이도, 옥희 내외도 만수의 희생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만수가 결혼을 하고 한숨 돌릴 무렵 그가 다니던 회사가 경영난으로 부도가 나고 직원들도 모두 흩어지지만 만수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공장을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건 공장 불법점거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서뿐이었다. 가족과 이웃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며 모든 것을 나눠주었던 만수는 이제 더이상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 곁을 떠날 수도 없었던 만수는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나는 힘들었고 불행했고 절망적이었고 좋아진 적이 없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 외면의 모습으로 어떤 평가나 동정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는 기적이 내게 일어났다는 걸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행복했다. 감미로웠다. 내가 나에 대해 가장 자신있어할 때의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주고 존중해줄 때의 느낌이었다." (p.346)
소설의 여러 인물들이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탓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참을 읽고 있다가도 '이게 지금 누가 하는 말이야?' 되묻게 되고 이야기의 처음 부분을 찾아 '나'의 정체를 파악해야만 했다. 이처럼 화자가 자주 바뀔 때에는 소제목으로 장을 나눠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작가는 그마저도 외면했다. 일부러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불친절한 소설임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작가는 베이붐 세대의 한 가족을 조명함으로써 산업화의 이면에 비친 우리 시대의 서글픈 모습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살아 있는 역사서에 가가웠다.
날이 개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서 살짝 비껴 선 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어떤 보살핌이나 애정도 받지 못한 채, 있는 듯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작가는 투명인간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을 꿈꾸었지만 지금 저 구름이 넘어가는 먼 산의 뒤쪽에도 그런 곳은 아마도 찾기 어려울 테지요. 소설은 그렇게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한 채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나의 일상은 마치 투명인간의 그것처럼 조용히 흘러갔습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