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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던 게 언제였던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무렵의 나는 셜록
홈즈나 괴도 뤼팽에 깊이 빠져들었고 뤼팽과 홈즈가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 생각하며 도무지 일어날 법하지 않은 공상에 시도 때도 없이 빠져들곤
했었다. 그 이후 추리소설을 일부러 멀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 멀어진 관심은 좀처럼 되돌아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추리소설과는 높은
담을 쌓고 지내는 동안 이따금씩 내게 들렸던 소식은 추리소설의 경향도 많이 변했다는 것과 선정성이나 잔인함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는
정도였다.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먼저 흠부터 잡는 게 세상사니까.
일본 추리소설계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식도 간간이 듣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한 출판사로부터 그의 작품 여러 권을
선물로 받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책장에서 뽀얗게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읽게 되다니...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우연은 누군가의 편견을 깨트리기 위해
존재하는가보다. 현대 추리소설에 대한 나의 섣부른 편견을 산산이 부숴버린 것처럼.
소설은 한 중학교의 과학 교과를 담당하는 유코가 자신이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을 상대로 종업식 연설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봄방학을
맞는 학생들에게는 더없이 들뜬 자리였으나 유코는 그렇지 않았다. 싱글맘이었던 유코는 자신의 외동딸이 교내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후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그녀에게는 이를테면 학생들과의 마지막 이별을 앞둔 시점이었다. 경찰은 그녀의 외동딸(마나미)이 추락사 했다고
발표했으나 유코는 자신의 반 학생 두 명에 의한 살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성년자인 학생들은 소년법에 의해 처벌을 받지 않으므로 그들 학생의
급식 우유에 HIV 감염 혈액을 주입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자력구제에 의한 보복을 실행한 것이다. 비록 사건의 범인을 소년 A와 소년 B로
이름을 감춘 채 지목하기는 했으나 술렁이던 아이들은 이미 그 대상이 누구인지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경찰에 진싱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A와 B의 처벌을 법에 맡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살의는
있었지만 직접 죽이지는 않은 A. 살의는 없었지만 직접 죽이게 된 B. 경찰에 출두시켜도 둘 다 시설에 들어가기는커녕 보호관찰 처분, 사실상의
무죄방면이 될 게 뻔합니다." (p.54)
2장에서는 유코가 교단을 떠난 후 학급의 반장이 된 미즈키의 이야기이다. 살인자로 지목된 소년 A에 대한 반 학생들의 집단 따돌림과
등교를 거부한 채 집안에 틀어박힌 소년 B, 그리고 새로 부임한 담임 선생님과 반장 미즈키의 생각과 시선이 교차한다. 담임과 미즈키는 등교를
거부하는 소년 B에게 매주 노트를 복사해 가져다주는가 하면 반 학생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 A를 구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미즈키는 소년 A와 가까워진다.
"역시 아무리 잔인한 범죄자라도 제재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결코 범죄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재는 평범한 세상 사람들의 착각과 폭주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77)
사건의 개요와 범인, 그리고 이어지는 피해자의 보복, 그것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을 책의 첫머리에 모두 배치함으로써 작가는 얼핏 위험성을
감수하는 듯하다. 어찌 보면 이게 전부다 싶고, 자칫 진부하게 흐를 수도 있겠다 싶은 이야기를 작가는 교묘히 비껴간다. 3장에서는 소년 B의
어머니가 쓴 일기와 그것을 읽는 소년 B의 누나를 통하여 한 집안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확신하는 소년 B는
에이즈로부터 자신의 가족만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방에서 칩거생활을 계속하지만 결국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함으로써 친족살해라는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다.
어머니를 살해한 소년 B는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나이 차가 나는 누나들, 일밖에 몰랐던 아버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높은 기대와
관심, 그런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와 외부에 대한 불만. 4장에서는 담임 유코의 딸을 살해하게 된 사건의 전말이 소년 B의 시선을
통하여 재조명된다.
5장에서는 소년 A의 회상이 이어진다. 전도 유망했던 과학도였던 어머니와 작은 전파상을 운영하는 아버지. 교통사고 현장에서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남편으로 받아들였던 어머니는 자신의 꿈을 접은 채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살아가지만 결국 소년 A를 버리고 이혼을 한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고, 이복동생들이 태어나고, 급기야 가족들 중에서 뒷전으로 내몰린 소년 A는 다시 돌아오겠다던 어머니의 말만 믿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친어머니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유난히 머리가 좋았던 소년 A는 담임 유코의 딸을 살해하는 과정에 동참하고 반
아이들로부터 자신을 도와준 반장 미즈키를 살해하고 그도 모자라 더 큰 범행을 계획한다. 한순간에 어머니의 사랑을 잃은 한 소년이 살인 기계로
변해가는 과정이 섬뜩하다.
"애초에 내가 쿠키를 먹지 않은 이유는 역겨웠기 때문이다. 중학생이나 된 아들이 친구집에 놀러 가는데
수제 쿠키를 들려 보내는 어머니도 역겨웠고, 그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들고 오는 시모무라도 역겨웠다. 이 녀석을 죽일까? 살의란 일정한
거리가 필요한 인간이 그 경계선을 넘어왔을 때 생기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p.227)
추리소설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마지막 반전에 달려있다. 교사 유코의 보복은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 유코의 결혼 전 남자친구는 에이즈
환자였다. 혼전 임신을 한 유코는 그 사실을 알고 서둘러 검사를 받았지만 다행히 자신과 딸은 감염되지 않았었다. 그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기도
했었지만 남자의 완강한 거부로 인해 싱글맘으로 지냈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던 딸이 죽고 유코는 그 남자의 혈액을 체취하여 우유팩에 주사하지만
그 남자의 훼방으로 실패했던 것이다. 학교를 사직하고 남자친구와 같이 지내던 중 남자는 죽는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유코는 소년 A를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마지막 범행에 쓰일 사제폭탄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다. 그곳은 바로 소년 A의 친어머니
연구실이었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던 소년 A는 결국 폭파 스위치를 누른다. 그리고 유코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된다.
"물론 두 사람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같은 반 아이들에게 어떠한 처벌을 받는다 해도 제 마음이
풀리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복수를 한 후에도 두 사람을 증오하는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아마 칼을 들고 두 사람을 손으로 직접
갈기갈기 찢는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겠지요. 모든 기억을 지워주는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p.258)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 뒤에는 언제나 자학이 도사리고 있다. 자학은 무기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 아니라 강렬한 유혹에
이끌리는 자신의 선택이라고 나는 믿는다. 결국 세상의 모든 범죄는 절망에서 비롯되기는 하지만 범죄에 이르는 과정은 순전히 본인의 선택에
의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윤리관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은 소년범죄에 대해서 우리 사회의 관대한 처분이 과연 바람직한가 작가는 묻고 있다.
절망이 자학으로 또는 범죄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제가 과연 개인의 윤리관뿐인가. 그 윤리관은 또 범죄로부터 얼마나
유용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