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순하고 소박한 삶 - 아미쉬로부터 배운다 ㅣ 타산지석 12
임세근 지음 / 리수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내게 종교란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미미한 것이지만 이런 나에게도 종교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군에서 같이 근무했던 후임병이다. 대대 군수과에서 근무했던 나는 부대 밖으로의 외출이 잦았다. 반면에 군수과의 서기 겸 잡다한 일을 처리하던 그 후임병은 본부중대 소속이 아닌 일반 전투중대에서 차출된 사병으로서 늘 군수과 사무실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후임병은 챠트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차출된 것이기에 그에게 맡겨진 업무는 언제나 넘쳐났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그의 업무를 대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붙박이로 사무실을 지켜야만 했다.
올림픽 준비로 한창이던 1987년의 여름, 공병부대였던 우리 부대의 부대원 대부분은 국군의 날 행사 시설을 짓기 위해 봄부터 여의도로 파견을 나가 있었다.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하는 전 군의 숙소로 사용될 24인용 천막을 세우고, 화장실을 짓고, 사열대를 비롯한 제반 시설을 짓는 것은 많은 인력과 자재가 소요되는 큰 공사였다. 눈만 뜨면 작업 현장으로 달려가는 일반 전투중대원들과는 달리 나는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 군지사(군수지원사령부)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볼일이 있어 부대로 복귀했는데 당시 일병이었던 후임병은 사무실에서 여전히 파견 나간 다른 사람들의 업무까지 처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나는 그에게 여의도로 문서수발을 보냈다. 모처럼 바람도 쐬고 업무에서 벗어나 짧은 휴식시간이라도 주고자 했던 게 나의 의도였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문서수발을 다녀온 후임병의 얼굴이 내내 어두웠다. 이유를 묻자 후임병의 대답인 즉 버스에 탄 어떤 여자 승객을 보고 음심을 품었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에 그리 큰 죄라고.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일방적인 판단이었지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도 후임병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당시 후임병은 부천에 있는 모 신학대학에서 종교음악을 전공하다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한 상황이었고, 그의 종교적 신념에 비춰볼 때 자신의 행위는 결코 용서될 범주 안에 있지 않은 듯했다. 후임병은 그 일로 한동안 괴로워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후임병의 믿음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었다. 지금은 대구의 한 교회에서 목사로 있는 그 후임병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트로트를 잘 부르고 재주가 많은 친구였는데...
이 책 <단순하고 소박한 삶=아미쉬로부터 배운다>를 읽으며 그 친구를 생각했었다.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채,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100년 전 방식으로 오늘을 사는 아미쉬 공동체의 삶은 그 친구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저자는 펜실배니아 주 랭카스터 지역의 아미쉬 공동체와 이웃하며 살면서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엄격한 율법 아래 겸허한 삶을 영위하는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이 많다. 용모, 복장, 행동, 의례 등 일상의 생활양식에서부터 종교 의식과 신앙 생활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일원으로서 지키며 실천에 옮겨야 할 사항들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모두가 이를 철저하게 지키고 따른다." (p.108)
교회도 짓지 않고 십자가를 비롯한 모든 우상을 섬기지 않으며,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거부하고, 사회보장 보험을 비롯한 일체의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며,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등 오직 성경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려는 아미쉬 공동체의 사람들. 물질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21세기에, 그것도 전 세계의 물질 문명을 선도하는 미국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아미쉬 공동체의 모습은 놀랍다 못해 신기하다.
2006년 초가을 어느 날, 아미쉬 공동체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들의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조건없는 용서'였다고 한다. 어린 자녀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범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명복을 빌고, 답지하는 성금을 범인의 유가족에게 먼저 할애해달라는 간청과 범인의 미망인과 어린 세 유자녀를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며 위로의 시간을 가졌다는 아미쉬 공동체의 관용은 물질 만능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유럽의 종교개혁 당시 개혁파 중에서도 강경보수주의자들이었던 '재세례파'의 후예인 아미쉬 공동체는 그 당시 이단으로 몰려 갖은 박해와 고난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폭력을 거부하고 소송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악한 현대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고,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들의 삶을 동물원의 원숭이들처럼 보여주려고도 했다고 한다. 더구나 랭카스터 지역을 찾는 관광객의 증가와 산업시설의 증가로 아미쉬 공동체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한다. 문명의 이기를 향유하며 사적 이익에 눈 먼 현대인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방식은 영원히 존채해야 하는데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아미쉬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 풍요나 삶의 질을 높이는 그 어떠한 변화나 개혁이 아니고, 그들의 전통적 삶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터전, 흙먼지 묻히며 땀을 뿌릴 수 있는 약간의 문전옥답門前沃畓이 필요할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