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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박범준.장길연 지음, 서원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벚꽃이 한창이다.
무엇보다도 나같은 도시내기들에겐 문명에 의지하지 않은 채 온몸으로 계절을 체감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계절이 머무는 시간이 너무나 짧은지라 '아, 봄이 왔구나'하면 어느새 더위가 저만치서 손짓을 하곤 한다. 음미하기엔 턱없이 짧은 계절은 그래서 아쉽다. 나는 매년 까닭없이 봄을 앓는다. 멍하니 서서 창밖을 응시하는가 하면, 아직은 시린 벤치에 앉아 할 일을 잊기도 하고, 춘곤증과는 다른 의욕 상실의 무기력증을 며칠씩 안고 살 때도 있다.
시골에서 태어났다고는 해도 딱히 농사를 지어 본 경험도 없는데 매년 봄이면 아련한 향수처럼 시골 생활을 그리워 하는 걸 보면 내 몸의 어느 한 편에 밀알처럼 작은 유전자가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매년 봄이면 습관적으로 찾아 읽는 책이 있다. 모든 일을 작파하고 당장 시골로 갈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약간의 대리 만족이라도 얻을 요량으로 누군가의 '시골 생활기'를 읽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은 책만도 줄잡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권수를 넘어선 걸 보면 나의 도시 생활도 꽤나 힘들고 고단했나 보다.
이런 나의 봄앓이를 부채질한 것은 며칠 전에 걸려온 큰형의 전화였다. 막 선잠이 들었던 나는 취기어린 형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고, 횡설수설하며 길게 이어지는 통화에 '나쁜 소식은 아니구나'하며 안도했었다. 그날 형은 자신이 퇴직하면 홍천에 가서 살겠노라고 했다. 그것이 현실 가능한 계획인지, 아니면 큰형 혼자만의 바람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형에게도 나와 다르지 않은 시골 유전자가 갑자기 되살아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형의 통화는 배터리가 다 소모되어 '뚜뚜' 소리를 내다 강제 종료될 때까지 이어졌었다.
내가 읽은 시골 생활기 중에 단연 으뜸은 야마오 산세이의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다. 그 외에도 여러 권의 책을 읽었지만 마음에 와 닿는 책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래도 생각나는 책이 있다면 오병욱의 <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정도가 될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올해 또 다른 책을 골라 읽었다. 책의 제목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KBS 1TV <인간극장>에 출연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에 없다. 남편과 아내는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의 엘리트로서 더 잘 알려져 있는 듯했다.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Part 1 우리는 행복을 선택했다"에서는 시골 생활을 선택하게 된 경위와 무주 '나무네 집'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 씌어져 있고, "Part 2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는 무주에서의 삶이, "Part3 결혼은 또 다른 연애의 시작"에서는 부부가 24시간 붙어서 사는 시골 생활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Part4 공감공락共感共樂 "에서는 부부의 가치관이 실려 있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행복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지금 행복을 선택한다.” 는 말은 그들이 시골로 가게 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다였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용기와 결단력이 마냥 부럽기만 하고 부부의 선택에 박수와 응원을 아낄 마음은 없지만, 최고 학벌을 지닌 부부였기에 가능한 결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천박한 의심도 아니 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들은 설령 시골 생활에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언제든 도시로 다시 돌아와 남들만큼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부부의 근황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지금은 제주도에 정착하여 작은 펜션을 운영하며 '바람 도서관'이라는 작은 도서관도 개관한 모양이다. 귀농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들만의 팁과 노하우가 자세하게 씌어져 있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 중에 비교적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한 장면은 어느 해 가을의 모습이다. 드문드문 흰 구름이 무심히 떠가는 더없이 맑은 날이었다. 나는 누렇게 마른 갈대밭에 누워 서걱이며 지나는 바람과 따스하게 내리쬐던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던 갈대 머리와 배경처럼 흐르던 흰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길게 멈추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 속에 평생의 '평화'를 담았다. 나의 피 속에 시골 DNA가 심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지 싶다. 나는 올해도 심하게 봄앓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