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힘들더라도 그동안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을 골라 한편의 리뷰라도 써야지,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한곳으로 생각이

모아지지 않는다.

 

어제는 하루 종일 가을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화창하게 개었다.

아파트 화단의 단풍나무가 유난히 곱다.

생명의 색깔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정처없다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러나 순간에 고정된 생명의 색깔은

그 얼마나 곱고 영원한가!

 

요즘은 유명작가의 소설을 위주로 책을 읽었다.

소설에도 시대에 따른 유행이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된다.

그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조각들을 버리기가

아까워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나이를 먹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기록되지 않은 생각들은 뒤늦게 떠올리려 해도

도무지 의식의 이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한번 스쳐 지나간 사물이나 집중하지 않고

읽었던 책들도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던

젊은 시절에 비하자면 나는 요즘 너무나 자주 깜박깜박한다.)

 

내가 정리, 비교할 작가는 알랭 드 보통, 밀란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 신경숙이다.

어떤 문학적 소양도 없이 내가 그저 직관적으로 느낀

생각들이기에 다른 분들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비평가가 아닌 단순 독자이기에.) 

 

우리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매혹되는 까닭은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유하는 생각의 메커니즘을 간소화시켜준다는 데 있다.  즉, 우리는 사물을 보고, 그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추상적 개념으로 인지하고, 그와 관련된 파생적 사유로 확장하는 단계를 순서적으로 밟게 되는데, 밀란 쿤데라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축소시킨다.  사물을 보는 행위와 그에 상응하는 파생적 사유가 그것이다.  인지 단계를 건너뛰는 밀란 쿤데라의 서술 방식은 독자들에게 사물의 묘사를 적극적으로 피력하지 않고, 대신에 주인공의 심리적, 철학적 사유로 이를 대체한다.  이러한 방식은 사물과 내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아닌 감적적 일체감을 느끼도록 한다.  독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속한 환경과의 완전한 일체감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물아일체의 감정은 우리에게 무한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바닷가에서 이상한 노스탤지어에 잠겼던 몇 분 동안 그녀는 불쑥 죽은 그녀의 아기를 떠올렸고 행복의 파도가 그녀를 감쌌다. 머지않아 그녀는 이러한 감정에 스스로 경악하리라. 그러나 감정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그냥 그렇게 생겨나고 모든 검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나 한번 내뱉은 말에 대해선 자책할 수 있지만 감정에 대해선 그럴 수 없으니 우리는 감정에 대해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아들의 기억이 그녀를 행복으로 충만하게 했고 그녀는 단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해답은 명확했다.: 장-마르크 곁의 그녀 존재는 절대적이며 아들의 부재 덕분에 그녀가 절대적일 수 있음을 의마한다. 그녀는 아들이 죽어서 행복했다. 장-마르크와 마주 앉은 그녀는 큰 소리로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의 반응이 어떨지 예측할 수 없었고 그가 그녀를 괴물 취급할까 봐 두려웠다.<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중에서>

 

신경숙의 소설은 다분히 시적이다.  그녀가 서술하는 방식은 극도의 리얼리즘, 사물을 눈 앞에서 보는 듯한 현장감, 또는 추상적 개념의 이미지화에 있다.  이러한 서술은 심상(image)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과 소설의 단절된 경계를 일시에 무너뜨리도록 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현실을 잊고 오로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한 경험은 힘든 현실을 잊고 소설 속으로 무작정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녀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가독력에 있다.

 

너를 도시에 데려다주고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밤기차를 탔던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네 나이와 같다는 것을 너는 아프게 깨달았다.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엄마라면 지금의 너처럼 두려움을 피해 이렇게 달아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매력은 독자들과의 거리두기에 있다.  나는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호객꾼이 없는 술집을 연상하곤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그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긴다는 듯한 그만의 방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를 개의치 않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작가는 교묘한 방식으로 독자들이 느끼는 의식의 물꼬를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여기에는 철저한 계산과 적절한 구성, 불필요한 문장의 배제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자신의 글을 수없이 고치고 다듬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흔이 되려 한다는 것, 그것도 내가 긴 여행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중에서>

 

알랭 드 보통의 소설에서는 여러 편의 수필에 소설의 스토리 라인을 덧씌운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때로는 수필이 주(主)고 소설은 그저 단절될 수 있는 각각의 수필을 이어주는 끈과 같은 역할만 할 뿐이라고도 여겨진다.  그것은 자칫 소설로서의 매력을 상실케 하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보여지는 지적 풍자와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위트가 알랭의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녹아있기에 독자들은 결코 그의 책을 놓지 못한다.  

  

유혹을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렵다. 너무 빨리 넘어가면 헤퍼보일 수 있고, 너무 미적대면 상대가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엘리스는 자존심을 구길 위험을 무릎쓰고, 집에 가서 이야기나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날 위험을 감수하면서 예의 바르게 작별 인사를 해야할까?
얌전빼는 태도와 모호한 태도에는 공통적으로 초조함이 배어있다. 머뭇거리면 상대의 관심을 잃을까봐 당장 잠자리로 가는데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 다음에 버려질까봐 두려워서 잠자리로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중에서>

 

나는 한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몇 권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로는 줄창 소설만 읽어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소설은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 고유의 영역을 넘어 다른 장르와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소설과 철학, 소설과 시, 소설과 수필 등 작가의 취향에 따라 그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구성과 문체에 집중하던 지난 날의 소설과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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