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섰을 때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태풍 카눈이 지나간 자리.

사람들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저마다의 우울을

낮은 빨랫줄에 널었다.

잗주름이 잡힌 우울은 바람에 펄럭이기만 할 뿐

시야에서 멀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짙은 구름은 사물의 그림자를 선명히 구획하지 못하고

한낮으로 갈수록 오히려 혼란만 가중된다. 

 

 

오전에는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벌어진 듯 머리를 맞대고

오글오글 모여 있던 내 의식들이 오후가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잠'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들 그쪽으로 우루루 몰려갔을을 때,

나는 그 중 몇이라도 붙잡으려고 헛힘만 쓰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수한 의식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떠받치던

눈꺼풀은 그들이 사라지자 힘없이 닫혔다.

그럴 때 나는 마치 수확이 끝난 논에 군더더기처럼 세워진

허수아비의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깐 졸았나보다.

지금은 구름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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