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이 풀려서인지 퇴근 후에는 잠만 쏟아진다.
분명 계절의 탓은 아니거늘 추곤증(秋困症)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자도 자도 끝없는 졸음이 밀려온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직장 동료들은 지난 1년 동안 내가 칼퇴근하는 바람에 저녁 한 끼도 같이 먹기 힘들었다며 퇴근 후에 식사라도 같이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심심찮게 듣곤 하지만 저녁이면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아져 다음에 하자는 말만 남기고는 서둘러 숙소로 향하게 된다.
어제는 점심 나절에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내용인즉슨, "쌤, 저 XX인데요. 못 본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보고 싶어요.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야자 끝나고 XX랑 잠깐 들를려고 하는데 괜찮나요? 답장 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올해 수능을 치르는 XX는 성적은 그닥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언제나 밝고 명랑한 학생이었다. 같이 공부를 할 때만 해도 아이들의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다운되었다 싶으면 기발한 언변으로 우리를 즐겁게 했었다. 그렇다고 공부는 뒷전인 그런 아이는 물론 아니었다. 가끔 농담삼아 내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곤 했지만 말이다. 쌤은 언제나 공부 잘하는 아이만 편애한다고.
오락가락 하던 비가 그치자 바람이 심해졌다.
퇴근길에 동네의 치킨집에 들러 통닭을 한 마리 예약하고는 아이들이 올 시간에 배달을 부탁했다. 야식을 먹으면 살찔텐데 하면서도 허겁지겁 먹어 치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올해 들어 한 번도 난방을 하지 않았던 숙소는 냉골이었다. 저녁을 대충 해결하고 잠시 책을 읽자던 것이 책 위에 쓰러져 깜박 잠이 들었다. 어느 정도 알맞게 훈훈해진 방 안의 공기 탓이었는가 보다.
초인종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소란스럽게 인사를 하며 들어서던 아이들은 내 이마에 선명하게 새겨진 잠의 흔적을 보고는 깔깔대며 놀렸다. 엎드려 잔 탓에 목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곧 치킨이 배달되었고 내가 예상한 대로 아이들은 닭다리 하나씩을 잡고는 밀어넣다시피 게걸스럽게 먹었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들의 방문 목적을 떠올렸는지 주섬주섬 책을 펼쳤다. 초딩도 풀 수 있는 문제인데 고3이 이것도 못 푸냐고 놀리자 유치원을 다니지 못한 후유증이 고등학교에 나타나는 것이라며 역시 농으로 되받아친다.
문제를 풀어주고 돌아갈 시간이 되자 아이들 얼굴이 굳어졌다. 불안하단다. 그러고 보니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아이들에게 있어 수능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자신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아닐까? 불안은 인간의 선천적 본성이라지만 며칠 남지 않은 수능과 그것을 걱정하는 아이들의 굳은 표정이 짠하게 느껴졌다.
밤이 늦었다.
아이들은 지금쯤 졸린 눈을 비비며 불안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지나고 나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약간의 후회만 남는다는 사실을 그 나이에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