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지 딱 1년이 되었다.
10년, 20년도 아닌 1년이라는 시간이 내게는 그에 버금가고도 남을 만큼 길게 느껴진다.
지방근무 발령을 받으면서 시작된 주말부부의 생활은 그렇게 갈망했던 자유의 가치를 발 아래 떨어진 담배꽁초보다 못할 정도로 짓밟어 놓았다.  혼자 사는 즐거움은 아주 잠시 뿐이었고, '자유'라는 허여멀건한 뼈대는 외로움과 무료함으로 구멍이 송송 뚫린 채 골다공증에 시달렸다.  나는 그 헛헛함을 메울 칼슘 성분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헐값에 팔아치운 '자유'에 대한 댓가치고는 시집살이가 만만치 않았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라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곳곳에서 터졌다.  고초 당초 맵다지만 나의 이중생활(?)에 비할까.  형편이 넉넉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수학을 무료로 가르치겠다는 나의 광고 아닌 광고는 빛의 속도로 하루에도 수십 번 동네를 맴돌았다.  느긋하게 중학생만 가르치려던 얄팍한 속셈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팬(?)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깨어지고 말았다.  내 삶에 두번 다시 찾아 오지 않을 듯싶었던 수험생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책의 제목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정석'을 다시 구해서 읽고, 영어 능력 향상에는 별 도움도 되지 못하는 부정사, 관계 대명사, 동명사 등을 가르치고, 직장에서는 병든 닭처럼 졸기 일쑤였다.  영문을 몰랐던 동료들은 내 건강이 걱정되었는지 심각한 어조로 건강검진을 권하기도 했었다.  내 좁은 숙소에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수다가 연일 이어지니 옆집의 항의도 빈번했다.  많은 아이들이 찾아 오고 또 떠나기도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얼굴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내 사정을 알게 된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회사가 공익적 차원에서 자금 지원을 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겠다는 호의를 아이들과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시킨 이후 나는 여러 갈등에 시달렸다.  퇴근 후 12시까지 이어지는 강의와 그로 인해 누적된 피로는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는 쪽으로 나를 몰아갔다.  나를 합리화하는 수많은 핑계거리들이 굴비 엮듯 줄줄 딸려 올라왔다.

7월 이후 나는 이 제목으로 단 한 줄의 글도 올리지 못했다.
어떤 의무감으로 꾸역꾸역 강의는 이어갔지만, 나의 속셈을 모르는 아이들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달라진 내 태도가 불안했던지 무슨 일이 있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떨떠름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가을 날씨만큼이나 쾌청한 결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잊었던 자유가 왕방울눈으로 윙크를 보내는 오후.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이 머리를 무겁게 한다.
나의 우유부단한 성격에 찬물이라도 끼얹고 싶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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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1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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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3 15: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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