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지수가 엿새만에 400포인트 가까이 폭락했다. 나는 오래 전에 주식시장에서 손을 떼었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개인 투자자들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9일 종가 기준으로 삼성전자 시가총액은 106조원인데 반해 엿새간의 급락으로 국내 주식시장에서는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 모두 합쳐 230조원의 자금이 증발했다고 하니 삼성전자를 2개나 사고도 남는 액수가 사라진 셈이다.
전 세계에 몰아치고 있는 'R'(recession)의 공포는 백약이 무효한 듯 보인다.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비가 증가해야 하는데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전 세계의 국가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소비의 증가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할 대책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뾰족한 대책은 없어 보인다. 그저 담담히 수긍하고 지켜보는 수밖에. 각국의 정부도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데 그 고민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나는 문득 이러한 상황이 중세시대에 창궐했던 페스트의 확산과 그 양상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 유럽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페스트)이나 아즈텍 제국의 원주민을 몰살시켜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을 이끈 '대역병',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확산에 따라 아시아 각국에서 창궐한 콜레라와 이질 등이 꼭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원한 흑사병은 중국 윈난 지역과 미얀마에서 창궐한 뒤 몽골군과 함께 중앙아시아 초원을 강타했고 이어 유럽을 휩쓸었다. 흑사병은 유럽대륙에서 1347년부터 1350년까지 4년 동안 전체 인구 수를 3분의 1 정도 줄였다고 한다. 당장에라도 말세가 닥칠듯한 극단적인 공포에 휩싸이게 했던 페스트는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무분별한 도시 확장과 환경오염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페스트로 인한 유럽 인구의 감소는 수도원을 짓기 위한 무분별한 삼림파괴와 도시화,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부족과 같은 여러 부정적인 면을 일소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자연은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잔인한 모습으로 응징하고, 원상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자정 능력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12 ~ 13세기에 상업이 발전하면서 육,해로를 통한 이동과 교역이 활발해진 것이 오히려 페스트의 신속한 확산을 도운 꼴이 되고 말았다는 점은 재밌다. 작금의 사태는 오히려 그때보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초로 그 전파 속도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지고 있다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글로벌화는 반드시 좋다고만 얘기할 수 없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흥망성쇠의 자연법칙은 어느 것이라도 예외가 없다.
그동안 우리가 누렸던 물질적 풍요는 소비증가의 한계를 바라보는 기업 경영인과 정부관계자의 한숨과 함께 쇠락의 길로 접어든 듯하다. 따지고 보면 세탁물을 위에서 넣는 방식이나 옆에서 넣는 방식이 기능상으로 무에 다른가? 우리는 그동안 '광고'라는 무언의 협박자에게 이끌려 이유도 없이 소비를 증가시켜 왔던 것이다. 그에 편승하여 성장했던 각국의 기업은 그 성장이 영원할 것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지금 그 허상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준비하여야 할까?
내 생각엔 어려웠던 우리의 과거로 되돌아 가 그때의 인내력을 배우고,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힘든 겨울을 한동안 겪다 보면 언젠가 따뜻한 봄날이 오지 않겠나. 그것을 비록 우리 세대에는 볼 수 없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