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면서 이런저런 사건의 근본 원인을 제대로 살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되지 못하는 까닭에는 자신의 우둔함을 비롯한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책이나 말에서 오는 폐해가 크지 않은가 싶다.  예컨대 지혜와 지식, 지식과 기술을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고, 이것을 읽거나 들었을 때 사실인 양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기술은 지식에 포함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지식은 단순히 앎을 기준으로 할 뿐, 몸으로 체득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삼지 않기에 지식과 기술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것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하겠다.

어제의 일이었다.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직장 후배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상의할 일이 있으니 시간 좀 내달라 청하는 것이었다.  딱히 거절할만큼 바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지라 장마철의 우울한 기분도 떨칠 겸 우리 둘은 근처의 커피숍으로 향하였다.  결혼 삼 년차에 접어든 후배는 아내의 낭비벽 때문에 고민이 깊은 듯했다.  올해 들어 천정부지로 치솟은 물가 때문에 가뜩이나 팍팍해진 살림에 아내의 낭비벽까지 더해 부모님 용돈도 드리지 못할 상황에까지 내몰렸다는 것이 후배의 하소연이었다.  말이 길어지자 후배는 공무원 생활을 하던 자신의 처남도 아내와 다르지 않아 경마로 많은 빚을 지고 최근에는 직장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며 처가 식구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등 분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후배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만 지켰다.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힌 후배는 어찌하면 좋겠냐고 재차 물었다.  나는 후배의 물음에 싱긋 웃으면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세상 물정도 모른 채 사업을 벌렸던 나는 처음으로 만져보는 커다란(?) 액수의 돈에 어찌할 바를 몰랐었고, 후에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종국에는 폐업을 결심하게 되었던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도무지 치장에는 관심이 없던 나는 낭비벽이 심했던 것도 아니고, 하루하루를 도박으로 소일했던 것도 아니고, 술이라곤 한 잔도 못하니 주색잡기에 빠진 것도 아닌데 나는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 돈을 펑펑 써보기라도 하고 망했더라면 억울하지나 않았을텐데 사업을 하던 내내 늘 돈 걱정으로 하루가 편할 날이 없었다.  어느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업을 하는 처음부터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는 드물다.  나도 그랬다.  마냥 순탄할 것만 같았던 사업은 어느 순간 어려워졌고, 경험도 돈도 없었던 나는 최대한으로 버티다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던 나는 용돈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었고, 성인이 되기까지 그 액수가 작든 크든, 내가 관리해야 할 돈을 몸에 지녀 본 적이 없었다.  일종의 물건이나 다름이 없는 돈은 그것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몸에 익은 '기술'이 필요했다는 것을 커다란 시련을 겪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식이나 지혜의 유무와는 관련이 적어 보였다.  새로 산 스마트폰의 사용 설명서를 아무리 열심히 읽는다고 하더라도 처음 접하는 기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없듯이, 돈을 다루는 기술도 실수를 통하여 몸에 체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단지 기술을 익히지 못한 사람을 마치 지식이나 지혜가 없는 무식하고 우둔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다.  단순히 오해로만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고, 비난은 더 큰 비난으로 이어져 급기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후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자신의 아내도 어린 시절을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경험했던 것도 아니니 돈을 다루는 기술을 익힐만한 마땅한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기술이 없는 사람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근거도 없는 다른 이유로 상대방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결혼을 하여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까닭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한 방면에 기술이 좋은 사람이 그것을 담당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보다 더 헌신적인 사람이라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실수를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그 실수를 절대 비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후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 즈음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내 이야기를 들으니 아내가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런 아내가 언젠가 돈을 잘 다루어 자신이 아무 걱정없이 자신의 월급을 맡길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돕겠다고 약속했다.

빗발이 가늘어졌다.
장마가 길어지니 맑은 하늘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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