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통 털어 우리나라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라가 있을까?
다른 나라에서 뉴스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기사 거리도 될 성 싶지 않은 뉴스가 버젓이 메인 뉴스에 등장하곤 한다.  그럴 때 슬며시 드는 생각은 나같은 외국인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혹시 안 좋은 이야기라도 퍼뜨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일부러 걸러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물론 그렇지야 않겠지만 단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는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너무나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는 것이다.  물론 어느 나라건 자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할만한 기사는 은근슬쩍 감추고 싶은 것도 있을테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없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의 범죄나 사건 사고는 낱낱이 공개되는 반면 유독 기업의 비리나 범죄 행위는 거의 기사화되지 않는다.  이것도 국격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까 싶은데 언론이나 정부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주지하다시피 기업의 범죄가 기사화되지 않는 데는 언론과 기업의 유착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국민들의 인식도 한몫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 월요일 MBC의 PD수첩에서는 <무늬만 ’동반성장?’ 위기의 중소기업>이라는 제목하에 대기업의 협력업체의 납품단가 인하요구 실태, 영세 상인들의 시장으로 인식되던 순대 시장 및 MRO 시장( MRO기
업이란  각종 사무용품에서부터 공구, 문구류, 건설자재 같은 소모성 자재들을 구매 대행하는 업체)에 진출한 대기업 및 특허권 분쟁을 통해 중소기업의 기술을 약탈하는 대기업의 실태를 보도했다.  갈수록 커져가는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 말로만 외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은 이미 그 도를 넘어 국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재벌권력은 언론권력을 장악하고 정치권력마저 무력화시킨 모습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대기업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한 직원의 표정에서였다.  무엇이 잘못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투의 침착한 어조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 직원의 표정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대기업이 돈을 벌어 재투자를 하든, 그렇지 않고 유보금으로 남겨 놓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재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청년 실업 문제 해결에 어려움이 많지만 대기업도 봉사단체가 아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임을 감안할 때 재투자를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규모 영세 상인의 생존권마저 침해하는 것은 일종의 약탈적 살인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중대한 범죄를 자행한 기업에 몸을 담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 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하기는커녕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식의 인터뷰는 양심이 실종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혹자는 ’직원이 뭔 잘못이냐? 책임이 있다면 경영자의 잘못이지 직원은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것이 아니냐?’하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살인을 교사한 사람만 처벌받고 범행을 실행한 사람은 면죄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주제에서 빗나간 이야기지만 교수형 시에는 발판 제거 버튼을 여러 명이 동시에 누른다고 한다.
알다시피 총살형 시에도 여러 명이 총을 쏜다.  뿐만 아니라 테러진압 등의 특수상황에서 테러범을 사살 할 때도 반드시 2명 이상이 조준사격하도록 되어있다. 단순히 "정의감"으로 인해 사람을 죽이기에는 죄책감이 너무 크게 작용하므로 여러 명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사람은 죄책감을 0에 무한히 가깝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그 죄책감을 나눠 가진다면.  범죄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는 "내가 한 건 아니니까"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 한구석엔 모두가
"나도 범죄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범죄에 가담한 모두가 죄책감을 나누어 가진 상황에서는 그 느끼는 강도가 지극히 약화되므로 이런 여건만 조성된다면 살인도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1박 2일을 보며 자란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렇게 외치곤 한다.  "나만 아니면 돼!"  이런 교육이 세상에 또 있을까?  승자 독식의 단계를 넘어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회.  나도 비록 기업체의 직원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나 자신을 뒤돌아보곤 한다.  내 업무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고 있지는 않은지.

여전히 비는 멈추지 않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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