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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 - 빛과 바람이 들려준 삶의 문장들
김산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5월
평점 :
참 우스운 말이지만 남자들의 로망은 대개 비슷한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년퇴직 후 시골에 가서 살겠다는 꿈이다. 비록 그것이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생각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철이 없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나의 지인 중 한 사람만 하더라도 그렇다. 평생을 신문사에서 근무했던 지인은 퇴직 후 시골에 가서 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더니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정말로 시골에 땅을 구입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곳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겠노라 선언하며 고급 자재를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그닥 좋아 보이지 않는 조립식 주택을 짓는 데 수억 원의 건축비가 들어갔던 것으로 안다. 집이 완성되고 지인들을 불러 집들이도 거하게 치렀다. 산비탈에 위치한 그의 집은 멀리 강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하고 풍광이 좋은 집이었다. 그러나 더없이 좋아하는 지인과는 다르게 그의 부인은 서울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시골 생활은 지인 혼자 꾸려가게 되었다. 부인과 자식들은 이따금 시간이 날 때마다 한두 번씩 들를 뿐이었다. 말하자면 시골 별장을 찾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족을 떠나 홀로 사는 삶이 외로울 법도 한데 지인은 그 생활을 무척이나 즐기는 듯했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하고, 심심하면 강이나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책도 읽고... 그러다 아주 가끔 가족이나 지인의 왁자지껄한 방문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등 나름 즐거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하기를 1년 남짓, 지인은 결국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복귀하고 말았다. 시골에 지었던 집은 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폐가가 되고 말았다.
"수년간 난로에 불을 피우며 알게 되었습니다. 이 비우고 채우는 과정이 우리의 삶과 참 닮아 있다는 걸요. 비울 때는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 잘 버려야 합니다. 아직 식지 않은 재를 함부로 버리면 화재가 나고, 바람 부는 쪽으로 재를 털면 고스란히 다시 나에게 날아옵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려야 할 게 있을 때는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고뇌는 재처럼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요." (p.214)
김산들 님의 에세이 <계절은 서두르지 않는다>를 읽는 사람들 중 몇몇은 작가와 같은 시골 생활을 꿈꾸게 될지도 모른다. 스페인의 고산 마을 비스타베야에 터를 잡은 작가의 삶은 더없이 평화롭고 풍요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해발 1,200미터의 고산 지대에서 보냈던 경험을 사계절로 나누어 펼쳐 놓은 그녀의 삶에서는 마치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열대 바람에 섞여 달콤한 과일 향기가 풍기는 듯도 하고, 고산 마을 사람들의 순수한 정이 현대인의 이기심에 쾅쾅 대못을 박는 듯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 자연은 결코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인간의 허술한 면을 봐주는 법도 없다. 자연은 연약하고 서툰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법 없이, 그들의 방식 대로 담담히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방식에 적응하고 익숙해지지 않으면 고통이 가중될 뿐이라는 걸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다.
"비스타베야는 해발 1,200미터에 자리한 고산 마을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산 능선들이 겹겹이 이어지고, 맑은 날에는 멀리 지중해의 푸른 기운까지 시야에 스민다. 산과 바다가 서로를 향해 길게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는 듯한 풍경이다.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길을 오르면,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산과 계곡은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대신 마치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고대의 터전처럼, 고요하고 기름진 고산 평야가 불쑥 눈앞에 펼쳐진다. 바람이 오래 머물다 가는 넓은 땅, 시야가 트이는 맑은 하늘, 계절의 숨결이 천천히 스며드는 그 평야의 한 산자락에 우리는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삶의 터를 내렸다. 이 땅의 오래된 시간 속에 살며시 끼어든 것처럼." (p.5 '프롤로그' 중에서)
나는 '산들무지개'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작가와 그녀 가족의 일상을 이따금 훔쳐보곤 한다. 지금은 고산 마을을 떠나 카스테욘 근교의 한 목조 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꼬맹이였던 아이들도 훌쩍 자라 제법 숙녀 티가 나지만, 고산 마을에서 깃든 순수함이 아이들과 어른들에게도 시시때때로 묻어 나오는 듯해서 별것도 아닌 그녀 가족의 일상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수십 년 도시 생활에 찌든, 한 명의 도시내기가 보내는 '순수'에로의 열망 또는 익숙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디디는 '순수'로의 착지가 아닐까 싶다.
"계절이 내어 주는 일을 따라가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비움'과 '채움'의 태도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싹이 트고 잎이 무성해지는 봄과 여름을 보내고 나면, 열매와 잎을 하나씩 내려놓는 추운 계절이 찾아옵니다. 계절은 그렇게 비우고 채우며 다시 이어집니다. 지구 어느 곳에서도 자연은 비우고 채우는 순환을 합니다. 모든 게 풍성할 것 같은 열대에서도 나무는 잎갈이를 하고 익은 열매를 떨어뜨립니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요.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에 맞추어 비축해야 할 때가 있고, 비축된 걸 다시 비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p.258)
또 하루가 저물고 있다. 우리는 동시에 2026년의 6월 한 달을 지우고 있다. 서로가 별것도 아닌 일로 아웅다웅할 때는 몰랐지만 시간은 정말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 시간의 흐름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왜 나는 매사에 초연하지 못할까?' 하는 의문에 빠지곤 한다. 나의 삶을 이렇게 빠르게 지워나가다 보면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애쓰던 모든 것들이 그저 헛되고 헛된 것으로 인식할 날이 곧 오고야 말 텐데 나는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하는가. 어깨가 처지는 기분이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10년 이상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