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돌 위에 피는 꽃
이순실 지음 / 밀알 / 2026년 4월
평점 :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남자에게 있어 병역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자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이기도 하다. 현역으로 군에 입대하여 제대하는 것만으로 모든 병역이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제대와 동시에 동원 예비군(1년차~4년차)에 편성되었다가 다시 일반 예비군(5년차~8년차)으로, 그리고 민방위대원(8년차 이후~40세)을 끝으로 비로소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복무 연한은 과거에 비해 대폭 줄어들기도 했고 처우와 보상 역시 크게 향상되어 그럭저럭 할 만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런 이들 중 나이 마흔을 넘겨 민방위대원으로서의 역할도 제외되는 순간, "나는 이제 대한민국 남자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하기도 한다.
학창 시절부터 교련 과목을 배워왔던 나로서는 군에서 제대한 후 예비군 훈련을 받는 게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대학의 교련 과목은 운동장에서 하는 실기보다는 이론과 정신교육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고, 제대 후 대학교의 학생 예비군에 편성된 후에도 군에 다녀오지 않은 후배 대학생에 비해 교육 시간이 조금 더 길다고 느꼈을 뿐 교육 내용에 있어서는 달라진 게 없는 듯 여겼다. 물론 당시에 초빙된 강사들의 강의라는 게 특별히 재미있거나 귀에 쏙 들어오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따분한 강의 시간을 견딘다는 게 그야말로 고문에 가까운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보란 듯이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서 잘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교묘한 자세로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거나, 고개를 외로 꼬고 대담하게 잠이 들어 코를 심하게 골다가 지적을 받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지만 말이다. 예비군 훈련이나 교련 시간에 다녀갔던 수많은 강사들의 강의 중에 비교적 많은 학생들이 눈을 똘망똘망 뜬 채로 강의에 집중했던 경우는 손에 꼽는 수준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건 당시 동독 유학생으로 있다가 탈북한 탈북 대학생의 강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길거리에서 북한 이탈 주민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거나 불가능에 가까웠던 까닭에 그들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기한 대상이었다.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어눌한 북한 사투리와 학생들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대한 우리와 다른 방식의 반응과 답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 사회의 실상에 대한 궁금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강의는 늘 인기가 높았다. 오죽하면 그들을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대중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을까. 물론 그들도 역시 방송 출연료와 강의료를 받은 돈으로 음식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3만 명이 넘는 북한 이탈 주민이 살고 있는 요즘, 북한 출신이라는 건 그들의 경쟁력이 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더구나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약해지는 시대에 방송 출연으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나와 같은 사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북한 이탈 주민 이순실이 쓴 <돌 위에 피는 꽃>을 읽으면서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났던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던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녀의 삶이 내가 예비군 훈련장의 강사로 접했던 동독 유학생의 삶과 겹쳐져 긴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참으로 춥고 추웠던 날, 양강도 혜산 역전에서 진통을 맞았다. 배를 끌어안고 출산할 자리를 찾았지만, 아기 낳을 변변한 자리가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짐승들도 새끼를 낳기 전에 둥지를 튼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아기 낳을 자리 하나 없다는 처지가 그렇게 서글플 수 없었다. 진통의 아픔으로 몸부림쳐도 그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역전 승무원들은 행여나 역전 안에서 아이를 낳을까 봐 당장 나가라고 내쫓기 바빴다. 역전 보일러 아궁이 옆에 쓰러져 있자니 이미 양수가 터져 다리 밑으로 물이 흥건했다. 지나가는 길손에게도 도와달라고 요청해 보았지만, 꽃제비 따위에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63)
공병부대 장교였던 아버지와 군단장 요리사로 근무했던 어머니 덕분에 저자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했던 듯하다. 그러나 저자가 군대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비극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연락도 받은 적 없지만 저자가 군에 있었을 때 두 분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고, 형제자매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 일컫는 극심한 경제난이 겹치면서 저자는 한순간에 꽃제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북한 탈출이 시도되었고, 번번이 잡혀 되돌아가서 고초를 겪었음에도 끝내 탈출에 성공하여 대한민국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철조망을 넘자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 탈출의 길이 살길이 될지, 죽을 길이 될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목숨 걸고 저지르는 도박과도 같았다. 이 길을 걸으려고 얼마나 수많은 탈북자들이 매 순간 목숨을 내걸고 모질게 버텨 왔을까. 살았다는 안도감 저편으로 북한에 남겨져 있을 가족들 생각에 이내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p.254))
무사히 우리나라에 정착한 저자는 여러 방송이나 유튜브에 출연도 하고, 김치와 냉면, 만두 등을 판매하는 식품사업도 운영하면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 듯하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나로서는 그녀의 얼굴이 그저 낯선 아줌마 중 한 사람일 뿐이지만 그녀는 어쩌면 3만 명이 넘는 북한 이탈 주민에게는 성공의 표상이자 고난 극복의 이정표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년 남과 북의 적대적 관계가 가속화됨으로써 매년 증가하던 북한 이탈 주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유를 갈망하는 북한 주민의 염원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곧 6월이다. 인도의 보도블록 위에는 까맣게 익어 떨어진 버찌 열매가 오가는 행인의 발길에 밟혀 얼룩얼룩 검은 반점을 남기고 있다. 우리가 살다 간 흔적도 그와 같을 것이다. 어느 노인의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우리는 각자가 걸어온 삶의 흔적을 그저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서서히 잊힐 테다. 선명하던 버찌 열매의 흔적이 행인들의 발길에 서서히 지워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