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다음날의 아침은 일상에 딱히 다른 이벤트를 첨가하지 않아도 극한의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특히 봄이라는 계절에 느끼는 기분은 뭔가 특별합니다. 전날에 비해 맑아진 공기와 더욱 가깝게 들리는 새소리, 마른 솔잎이 젖어들면서 내뿜는 달큰한 향기와 젖은 낙엽으로부터 풍기는 구수한 내음까지 더하여 새벽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그야말로 도파민 과잉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아침이 그랬습니다. 길옆으로 노랗게 핀 애기똥풀 꽃과 이제 막 향기를 내뿜기 시작한 아카시아 꽃을 눈에 담느라 걸음은 마냥 느려졌습니다.


최근에 나는 회사일과 집안일이 겹쳐 꽤나 분주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 바람에 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마저 읽지도 못한 채 반납하고야 말았습니다. 바쁜 일이 풀리면 읽어야지, 했던 생각은 한낱 거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로 인하여 책을 대여하고자 했던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대여 기간을 꽉꽉 채워 반납한다는 게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매우 이기적인 행위였음을 도서관 직원에게 책을 반납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빌린 책들 중에는 두어 권의 예약 도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반가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2월 중순 이후로 만나지 못했던 멋쟁이 할아버지였습니다. 이사를 가셨는지, 혹시 아픈 건 아닌지, 그럴 리야 없겠지만 큰일을 당하신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들이 스쳐갔었는데 할아버지의 건강하신 모습을 다시 보게 되어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건네자 할아버지 역시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그동안 뵐 수 없어서 멀리 이사를 가셨나보다 생각했다고 말씀드리자, 사실은 할아버지께서 이용하는 등산로의 초입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신의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었다며 그것 때문에 캄캄한 산길을 오르는 게 무척 겁이 났었노라고 하셨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집 근처에서 산책으로 일관하다가 지금은 새벽 5시 30분에도 날이 훤하게 밝은 까닭에 다시 산에 올라 운동을 할 생각이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비가 와 인적이 드물었던 공원에서 홀로 걸었던 시간을 다시 걷는다. 그날 내가 걸었던 건 외로움이었을지,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하지 못한 고독이었을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우수수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에서 무엇을 놓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발목을 타고 흐르는, 첨벙거리는 물의 감촉을 통해 때 묻은 시간을 씻고 싶었을 수도 있다. 우산을 쓰고 걷다가, 우산을 던지고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도 아무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곳에서 잠깐의 자유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보겸 작가의 <서른에 시린> 중에서)


온종일 바람이 불었습니다. 기신기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 게 방금 전인 것 같은데 또 하루가 흘러가버렸습니다. 젊었던 시절엔 몰랐는데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는 채 정신없이 바빴던 날들이 지금은 무척이나 아깝게 느껴집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할 수 있다면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을 기쁘게 되돌아볼 수 있는, 그럼에도 그 낱낱의 시간들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그런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페터 빅셀의 산문집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의 제목처럼 나 역시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멋쟁이 할아버지와의 재회는 오늘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수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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