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이 정말 많이 길어진 듯합니다. 나는 하루를 대개 새벽 5시 30분쯤에 시작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시각의 하늘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나설 때면 언제나 주머니에 손전등을 챙기곤 했습니다. 손전등은 산을 오르기 위한 필수품이었기 때문입니다. 1시간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즈음이면 그제야 도시 저쪽으로 오렌지색 햇살이 번져 잠에 취한 사람들을 깨우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나는 손전등도 없이 집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이미 갓 돋은 햇살이 자르르 윤기를 더하고, 어슴푸레하던 건물의 윤곽이 반듯반듯 제 형태를 찾기 시작합니다. 푸르스름한 어둠의 흔적만이 그늘진 숲을 간간이 떠돌 뿐입니다.
사실 그닥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겨우 한두 해 산 어린애도 아니고, 낮이 짧아지고 다시 길어지는 계절의 순환을 적어도 수십 번 반복하여 경험한 터이지만, 나는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손전등도 없이 등산로를 오를 수 있는 날이 도래하면 그것이 마치 내 인생에 있어 첫 경험인 양 놀라곤 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어제 있었던 일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낮은 기억력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요즘 아베 아키코의 장편소설 <카프네>를 읽고 있습니다. 삶을 살다 보면 어떤 계기로 우리는 이따금 손도 까딱할 수 없는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집안은 온통 난장판으로 변하게 되고, 우리의 일상은 무너집니다. 때가 되면 낮이 길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살기 위해 지난 어둠을 몰아내야만 합니다. 어둠이 쌓이면 예전에 경험했던 가벼운 일상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법이죠. 설거지, 청소, 빨래 등 반복적으로 해야 할 집안일을 한번 미루기 시작하면 금세 쌓이고 쌓여 자신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주변의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으면 가벼웠던 일상은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단단하고 규칙적인 것으로만 보였던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허술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냉장고 문을 닫은 세쓰나는 린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래는 암울할지도 모르지만, 달걀과 우유와 설탕은 어지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 너는 너랑 엄마가 먹을 푸딩을 네 힘으로 언제든 만들 수 있어." 세상 전부가 싫다는 듯 짜증이 가득했던 소녀가 지금은 조용히 세쓰나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천천히 물기를 머금고 흔들리는 것을 가오루코는 바라보았다." (p.133~p.134)
한 번의 게으름이 다음에 할 일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다음이 두려워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때그때마다 빠릿빠릿하게 처리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번쯤 미루기도 하고,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곧 제자리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렇게 일상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다시 아침이 찾아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재된 마음의 회로가 일순 모든 것을 포기한 양 멈추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필요로 하는 순간입니다. 마음의 회로가 멈춘다고 해서 생존에 필요한 일상의 회로조차 멈추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설 <카프네>는 독자들에게 그것을 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