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계절의 변화가 어찌나 빠르던지 변해가는 산의 모습을 여유롭게 감상하기는커녕 어, 하는 사이에 벌써 꽃이 피고, 새순이 돋고, 새벽어둠을 뚫고 지저귀는 새의 울음소리가 하나둘 늘어가는 것을 채 헤아리지도 못한 채 봄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듯합니다. 봄의 정취를 미처 느껴보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등산로에서 새초롬히 핀 진달래를 보았습니다. 겨울을 벗어난 날은 며칠 되지도 않은 듯한데 양지쪽에 앉았을 때의 느낌은 겨울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진 듯 여겨져 다가올 여름이 새삼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의 입구 공터에는 최근 누군가 어설프게 만든 닭장 하나가 세워졌습니다. 그곳에 풀어놓은 수탉 한 마리가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곤 합니다. 도시 한가운데서 듣는 수탉의 울음소리는 꽤나 생경하게 들립니다. 나를 여기에 이렇게 가둬두는 건 부당하다고 말하려는 듯 수탉의 울음소리는 무척이나 거칠고 우렁찹니다. 나는 오늘도 자유를 갈구하는 듯한 수탉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산에 올랐었습니다. 인간의 식량조달을 위해 닭을 키운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자유마저 빼앗을 권리가 있는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로 근무했던 박선영의 에세이 <그저 하루치의 낙담>에는 18세기 낭만주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 '늙은 선원의 노래'가 등장합니다. '...... 너무 놀라고쓸쓸해진 채/그는 집으로 돌아갔다./이튿날 아침 일어났을 때/그는 더 슬프고 더 현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작가는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더 슬프고 더 현명한 사람A sadder and a wiser man, 깨달음이란 기쁨과 함께 오지 않고 슬픔과 함께 온다는 것. 사람을 더 현명해지도록 만드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는 것. 더 현명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더 슬픈 사람이며, 그것이 내가 그토록 강렬하게 슬픔의 수집가가 되려던 이유였던 것이다. 나는 삶을 잘 살고 싶다. 삶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삶의 폭력을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고 싶다. 그러려면 슬퍼야 한다. 슬픔에 귀 기울여야 한다. 슬픔만이 나를 그 길로 안내할 수 있다." (p.106)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슬픔은 가장 낮은 등급의 감정인 까닭에 슬픈 노래를 듣거나 슬픈 이야기를 듣거나 슬픈 내용의 소설이나 영화를 감상할 때 우리는 한없이 안온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기쁨보다는 슬픔으로 구성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들었던 수탉의 울음소리가 온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도 나 역시 오늘 하루를 슬픔 속에서 온전히 머물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고 노래했던 김영랑 시인이 떠오릅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 어울리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