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잉 아이 - Dying Ey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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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든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주로 '분노'나 '화'를 그 잣대로 삼는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거나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철이 든 사람으로 분류한다는 뜻이다. 내 기준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도 들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한다는 얘기 아닌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이 들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다음 생을 기대하면서. 21세기의 유행은 철이 들지 않은 채 죽는 것이라서 그래,라고 말한다면 뭐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것도 유행에 속할지 아닐지의 문제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유행에 동참하고자 일부러 철이 들지 않은 채 죽었다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아무튼.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다잉 아이>는 철이 들기도 한참 전인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억울하게 죽은 한 여인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미스터리 호러'에 가까운 이 소설은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으스스한 공포를 안겨주기도 하고, 작가 특유의 독특한 구성 방식을 구축함으로써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그 결말을 알 수 없게 한다.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혈 독자는 아니지만 머리가 복잡하거나 독서 권태기에 빠져들 때 읽으면 어느 정도 즉각적인 효과를 보곤 해서 이따금 생각이 날 때마다 읽곤 한다. 말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코가 맹맹하고 으슬으슬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먹는 타이레놀의 효과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신스케는 형사 재판의 판결이 떨어진 직후부터 '양하'에서 일했다. 판결 내용은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이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도 상관없었지만, 에지마가 손을 써 한동안 치즈코의 가게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에지마의 머릿속에는 그래야 신스케가 불필요한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란 배려와 더불어, 사고에 대해 알고 있는 '시리우스' 단골손님의 시선을 의식한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p.91)


소설의 주인공인 아메무라 신스케는 에지마가 주인인 '시리우스'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지마의 차를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냈고, 그 사고로 기시나카 미나에라는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난 신스케는 '양하'로 자리를 옮겨 새 생활을 시작한다. 영업이 끝나갈 시간에 찾아온 한 남자의 습격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신스케는 기억의 일부를 잃게 된다. 신스케를 공격했던 사람은 죽은 미나에의 남편인 기시나카 레이지였고, 그 후 그는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자신이 저지른 교통사고 당시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던 신스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기억을 되찾는 일에 매달린다. 여기에는 동거녀였던 나루미의 실종이 한몫했다. 자신이 병원에 있는 동안 집 안을 깨끗이 정리했던 것은 물론 자신의 물건 역시 마구 옮겨져 있었다.


"나루미가 없어졌을 때 그녀의 화장대에 드라이버가 놓여 있었다. 자기 방에서는 본 적 없는 십자드라이버였다. 혹시 나루미가 그 드라이버로 세면실 거울을 떼어 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것을 훔쳐 간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짚이는 게 있었다. 신스케가 퇴원해 돌아와 보니 집 안이 싹 바뀌어 있었다. 마치 대청소를 마친 뒤처럼 보였다. 나루미가 그 '무언가'를 찾으려 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집 안을 그렇게 바꿔 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p.275)


신스케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사고 전후의 내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날 운전을 했던 당사자는 신스케가 아니라 에지마였고, 미나에의 자전거를 치고 갑자기 핸들을 틀어 차선을 넘는 바람에 옆차선에서 과속을 하던 페라리 한 대가 에지마가 운전하던 벤츠와 충돌한 후 미나에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게다가 페라리를 운전했던 것은 건설회사 직원인 기우치가 아니었고, 기우치의 약혼녀이자 건설회사 사장의 딸이었던 미도리였다. 음주운전을 했던 미도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던 기우치 역시 사고 당사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미나에의 마지막 눈빛을 기억하고 있던 미도리는 레이지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고, 방문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미도리는 점차 사망한 미나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광고 인형을 전문적으로 만들었던 레이지의 도움을 받아 미나에의 얼굴로 변신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체중을 감량하고 식습관까지 닮아갔다.


"기시나카 미나에가 죽어 갈 때의 눈. 생명이 꺼지기 직전까지 그녀는 집념의 빛을 번뜩였어. 삶에 대한 집착의 빛,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죽어야 하는 무상의 빛, 자신을 그런 꼴로 만든 상대에 대한 증오의 빛이었지.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끔찍한 눈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p.395)


미나에의 모습으로 화한 미도리는 복수를 위해 신스케의 주변을 맴돌게 되고, 기억을 잃었던 신스케 역시 우여곡절 끝에 기억의 대부분을 회복하면서 다시 에지마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동거녀였던 나루미의 행방을 묻게 되는데...


지금 당신에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철이 덜 들었거나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남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어떤 목사는 대통령 이름을 들먹이면서 그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공공연히 떠들기도 한다. 그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의 지능은 세살배기 어린애에 불과한 것이다. 이번 생에서 그가 철이 들기를 기대한다는 건 죽은 나무가 되살아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때로 '분노'를 통하여 살아갈 에너지를 얻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시기는 마냥 늦어지게 된다. 내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어느 목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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