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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전연명의향서 - 죽음을 인식하면 삶은 다시 정의된다
김지수 지음 / 북루덴스 / 2026년 1월
평점 :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죽음'에 연관된 책을 자주 읽게 된다. 연초부터 말이다. 리뷰를 쓰기 전에 읽었던 책을 소개하자면 캐나다 출신 조력 사망 전문의인 스테파니 그린이 쓴 <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와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디디에 에리봉의 저서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이 그것이다. 그렇게 이어져 온 독서는 김지수 아나운서가 쓴 <나의 사전연명의향서>에까지 이르렀다. 꽤나 오래전에 읽었던 김영민 교수의 저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빗대어 말해보자면 '연초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쯤 되겠다. 우리 모두 끝이 있다는 것, 언젠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가정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긴다는 건 오늘 하루를, 올 한 해를 의미 있게 살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이 유한하다는 건 불행이 아니라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하나의 질문에서 비롯됐다. "존엄한 삶은 무엇인가?" 여기서 '존엄한 삶'이란 내가 어떤 삶을 존엄하다고 믿는지의 문제이다.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아버지를 떠올렸다. 마음 깊은 곳에 묻어뒀던, 지금까지도 온전히 마주하기 힘든 기억의 일부를 끄집어냈다. 고3이었던 1994년 가을, 아버지는 난치병을 선고받았고 6년간 이름 모를 병과 싸웠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죽음이란 걸 마주했다. 그것은, 난치병의 탈을 쓰고 환자의 장기 하나하나를 망가뜨리며 숨통만큼은 쉽사리 끊지 않는 괴물이었다." (p.11 '프롤로그' 중에서)
작년 말에 읽었던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역시 이 책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의 저자인 김지수 아나운서 역시 죽음 앞에서 마냥 무기력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자신 역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로 인해 보건의료 분야를 취재하는 기자로 살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위중한 환자들을 만나 취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앓고 있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끊임없는 자살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삶을 끌어안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나쁜 생각의 기세가 나보다 커지면 안 되기 때문에 늘 지켜보고 감시해야 했다. 이렇게 마음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건 내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노력함에도 몹쓸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좌절하기도 했지만, 내 나름의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의사가 개입하는 치료 영역과 별개로 나의 내면을 스스로 돌볼 '통로'가 필요하다는 것. 그건 마음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돌봄'이어야 했다. 그게 뭔지 당장 알 수 없더라도 내면을 돌볼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겠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p.57)
책은 모두 4개의 장(chapter)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의 투병 과정을 담은 Chapter 1. '아버지는 밤에만 울지 않았다', 취재 현장에서 경험한 말기 환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통해 깨달은 것을 기록한 Chapter 2. '존엄한 삶이라면'과 Chapter 3. '정체성을 지킨다면 존엄한 죽음이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았던 존엄한 삶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은 Chapter 4. '나의 사전연명의향서'가 그것이다. 존엄사나 의료 조력 사망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존엄하게 삶을 마감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기대수명이 늘면서 암 환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한 죽음을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치료 가능성이 없는 환자와 가족들이 존엄사가 허용되는 나라로 나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평화롭게 맞는다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요즘 반가운 소식을 자주 접한다.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통계들이 발표되고 있다. 임종 과정에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미리 의사를 밝혀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이 300만 명을 넘겼다는 데 이어, 이러한 사전 서약에 따른 연명의료 중단 건수가 5만 건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임종을 늦추는 의료서비스를 받지 않는 대신 삶의 마지막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다 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P220 '에필로그' 중에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았던 기억은 어느 왕조의 오래된 유물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스러질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아쉽다거나 서럽다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누구나 그렇듯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만큼은 크게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존엄한 삶의 출발점은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존엄한 죽음도 결국 그 연장선에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점점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로 관심의 추가 서서히 기울게 된다는 점은 우리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듯 보인다. 내게 남은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죽음에 이르러서도 저 공원의 푸른 소나무처럼 담담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 바람이 어쩌면 이승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크나큰 욕심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