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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삶을 열다
정혜윤 지음 / 녹스 / 2025년 10월
평점 :
책은 물리적으로 접근성이 가장 좋은 물건인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가장 먼 물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집과 사무실에 미처 읽지도 못한 책들을 마치 때 지난 과제인 양 떠안고 살면서도 단 한 줄의 문장도 읽지 않은 채 하루를 마감하는 날들이 허다하니 때로는 책이 하나의 벽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럼에도 나를 옥죄는 삶의 난제들이 밤잠을 설치게 할 때면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어느 작가의 글귀들이 잠들었던 신경세포인 양 나를 일깨운다. 책은 그렇게 머릿속에 차곡차곡 순서대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몸속 하나하나의 세포에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정혜윤 PD의 에세이 <책을 덮고 삶을 열다>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생각이 먼저 들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위태로운 순간을 대비하여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그와 같은 순간에 자신이 읽었던 책을 먼저 호출하고, 불러온 책의 한 대목을 주문(呪文)처럼 외며 마음의 평안을 갈구하곤 한다. 책은 그렇게 우리의 몸 곳곳에 스며들었다가 필요한 순간에 짠 하고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증명한다. 작가 역시 수십 년간 라디오 프로듀서를 하면서 맞닥뜨렸던 수많은 재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를 붙잡아주었던 책의 힘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책을 덮고 삶을 열다>는 작가가 마음으로 읽었던 책들이 오롯이 삶의 현장으로 옮아 와 흔들리는 자신을 지켜주었던 지난 경험의 이야기이자 그와 같은 책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이다.
"원치 않는 재료가 널린 거친 작업장에서 삶을 빚는 나의 작업 방식은 언제부터인가 책을 섞는 것이었다. 슬픔에다 책 큰 스푼 듬뿍, 외로움에도 책 두 스푼, 실망에도 책 한 즙 쭉. 두려움에는 책 한 국자. 쓰디쓴 재료에는 감미로운 책 한 그릇. 나는 온갖 재료에 책을 섞는다. 이렇게 많은 삶의 재료가 있는데 여기서 아무 좋은 것도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할 때도 책을 섞었다. 이를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하는 말 같은 것.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는 더 재미있어요." 나는 음식을 먹듯이 책을 흡수했고 거기서 영양분을 취했고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재료(현실)를 다루는 나의 방식이고 내 인생의 작업 비밀은 내가 책과의 혼합물이라는 점이다." (P.32~P.33)
작가는 이 책에서 이자크 디네센, 허먼 멜빌, 제프 다이어, 이탈로 칼비노, 배리 로페즈 등 우리가 익히 알 만한 이름들을 호명한다. 그리고 작가는 상상이나 관념으로만 떠돌던 그들 대문호의 작품을 현실에 섞는다. 한겨울 경찰차에 막혀 남태령을 넘지 못하던 농민들 곁을 함께 지켰던 시민들, 무안공항에서 있었던 비행기 폭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을 돌보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세월호 유가족, 눈물이 흐르던 고래의 얼굴을 기억하는 원양어선 항해사들의 이야기는 작가가 읽었던 어느 작가의 문장 속으로 스며든다. '바베트의 만찬', '모비 딕', '그러나 아름다운', '호라이즌'...
"우리는 읽는다. 외롭고 괴롭기에. 우리는 읽는다. 도움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읽는다. 길을 찾길 원하므로. 읽기는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가슴에 아름다움이 있는 채로 살아낼 수 있다. 독자인 우리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읽은 책 너머, 쓰인 책 너머, 아직 읽히지 않은, 쓰이지 않은 우리의 삶이 있다." (P.179~P.180)
나는 세상과 동떨어져 무작정 책만 읽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멀리하면서 오직 세상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사람의 정상 체온인 36.5도에 이르게 된, 가슴 따뜻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자면 누군가의 이야기가 나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내 이웃의 눈물과 나의 눈물이 더해져 빛나는 미소가 되었던 경험을 누군가와 나누어야 한다. 나는 여전히 이웃의 슬픈 눈물에 같은 양의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늘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아는 것은 내가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름다운'은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린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에 건드려지는 부분을 '존재의 핵심'이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핵심에 있는 것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든다. 마음이 운명과 관계를 맺게 만든다. '그러나 아름다운'은 나를 변하게 할 힘이 있다. 나를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신시킨다. 나는 슬픈 사람의 아름다운 자아를 사랑한다. 아무리 가슴 아픈 일이 생겨도 아름다움은 여전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P.90~P.91)
점심을 먹고 집 근처의 공원을 거니는데 한 무리의 비둘기 떼가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엔 푸른빛의 냉기가 흐르고, 공원에는 어제 내린 눈이 가득한데 저 비둘기 떼는 어디에서 오늘의 허기를 달랠 수 있을까. 나는 사라져 가는 비둘기의 잔상을 눈에 담으며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온기를 잃은 겨울 햇살이 눈밭에 부딪혀 부서진다. 산다는 게 저토록 힘든 일인가, 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바삐 서두르지 않아도 집은 차츰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