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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ㅣ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평점 :
무엇인가 닮고 싶은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처럼 쨍한 추위가 내려앉은 오후의 여린 햇살만큼이나 소중하지 않은가. 그것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 그루 나무일 수도 있고, 바다를 유영하는 한 마리 고래일 수도 있겠다. 다만 닮고 싶은 대상과 나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넓거나 좁으면 약간의 부작용이 따른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비단 나와 종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물리적 간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애초에 나는 '닮고 싶었'을 뿐이지 기필코 '그것이 되겠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나무와 같은 부동심일 수도 있고, 고래와 같은 자유로움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되고 싶다는 희망이랄까, 아니면 꿈이랄까 뭐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에 필요한 열정이 펄펄 끓어 넘칠 듯 뜨거울 필요는 없겠다. 미지근한 온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박예진 작가가 엮은 <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을 읽는 동안 여러 생각들이 두서없이 쌓였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인 동시에 내가 가장 멀리하고 싶은 소설 중 하나인 까닭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요조는 성인이 된 후에도 어떤 순간, 어떤 사람 앞에서도 무방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킬 어떤 자세나 의지도 없이 타인 앞에 무방비로 등장한다는 것은 삶에 무책임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동시에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극도의 모성애를 유발할 수 있는 유인책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조는 생각하기에 따라 가장 이기적인 인간으로 비칠 수 있다. 인간 삶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에 휩싸인, 그럼에도 타인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누구보다도 잘 유도할 수 있는, 극과 극의 이중적인 인간이 바로 요조라고 이해된다.
"sentence 025
나는 사람들을 몹시 두려워했고, 이상하게도 두려워할수록 더 많은 호의를 받았다. 그리고 호의를 받을수록, 나는 더 깊은 공포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사람들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p.48)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해지는 <인간 실격>은 인간의 나약함과 위선을 매우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사실 작가는 유복한 집안의 11남매 중 열 번째이자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고, 거듭된 자살 시도와 마약 중독, 불안정한 연애와 결혼 생활은 그의 삶을 파국으로 몰았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이 소설 <인간 실격>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데 최소한의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고 작가 스스로가 생각했다면 그것은 지극히 오만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다자이의 문장들은 차가운 고독으로 독자를 껴안습니다. 그러나 그 고독은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달려라 메로스>의 메로스처럼, 그는 인간의 신뢰와 가능성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아무리 삶이 비극적이라 해도, "사람은 믿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작가. 그의 삶과 문학은 절망을 가로지르며 희망을 말하는 인문학입니다." (p.16 '프롤로그' 중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들에서 발췌되어 그의 사상 전반을 훑어볼 수 있는 이 책은 설령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색깔이 다양한 그의 소설 속 여러 문장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박예진 작가의 설명을 읽다 보면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한 편쯤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지도 모르겠다. Part.1 '부서진 마음의 언어들', Part.2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깨지기 쉽다', Part.3 '나를 만든,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Part.4 '희망은 때론 가장 잔인한 거짓말이 된다' 등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될 듯하다.
"<사랑과 미에 대하여>는 다섯 남매가 즉흥적으로 창작한 이야기와 현실이 교차하는 순간을 통해 허구와 진실, 가족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본격적인 전개는 노수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 짓기에서 시작되는데, 남매들은 각자의 개성과 시각을 반영하여 수학자라는 인물을 세밀하게 구축해 나갑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난 순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며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p.187)
유독 겨울에 어울리는 작가가 있다. 다자이 오사무도 그런 작가 중 한 명이다. 창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뱃속이 헛헛하여 어제 먹다 남긴 찐 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면 다자이 오사무가 쓴 슬픈 문장 때문인지, 물기 없는 고구마의 퍽퍽함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 이가 시리도록 찬물 한 사발을 들이켜고 우리는 또 자리에 앉아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읽고 목이 메도록 고구마를 먹는다. 겨울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