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러운 시간이 묵묵히 흘러가는 동안 나와 당신의 틈새를 메웠던 삶의 질료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따금 생각하곤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조급하거나 성마른 성격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소한 이유로 당신과의 관계를 무 자르듯 싹둑 단절하거나 데면데면 멀어지지 않은 채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지켜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랄까 원천이랄까 뭐 그런 게 궁금했던 것이지요. 우정이나 공감 또는 배려와 같은 추상적인 단 어로 대답을 갈음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 미진한 부분이 남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것도 아니요, 남녀 간의 사랑과 같은 본능적 관계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나는 우르술라 누버가 쓴 책 <나는 ‘아직도’ 내가 제일 어렵다>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신과 내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오랜 세월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작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면 우리는 ‘발가벗은’ 채로 다른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 이마에 적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타인이 내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감정이나 희망사항, 계획을 호기심 가득한 낯선 사람의 시선에서 지켜낼 수 없다. 비밀이 없다면 무방비 상태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 희망, 욕구에 휘둘리기 쉽다. 즉 비밀은 우리 인생에 어떤 권한도 없는 사람이 우리 삶에 함부로 기웃거리지 못하게 막아주는 울타리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비밀은 윤활제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밝히고 드러내야 한다면 사회 공동체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절대적 진실’만 존재하는 사회는 스스로를 감당하기 힘들다. 긍정적인 비밀에는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매력적인 사회적 가치가 있다.” (p.13)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비밀’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어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서로의 비밀을 조금씩 공유해 왔던 것입니다. 삶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언제나 자신이 간직해 온 비밀을 조금씩 조금씩 상대방에게 주입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자가 정한 삶의 테두리 속으로 상대방의 출입을 무시로 허락하게 되었고,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맞잡지 않았어도 우리는 단단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였는지 확실한 시점은 떠오르지 않지만 내가 언제부터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당신 은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우물쭈물 얼버무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비밀’이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기로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나 특정 시점을 명시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도 하나둘 비밀이 생겨나면서부터 책과 자연스레 가까워졌음은 분명한 듯합니다. 독서란 결국 타인의 비밀을 공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밝힐 수 없는 어떤 비밀을 끌어안게 된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누군가의 비밀도 궁금해지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어쩌면 타인의 ‘비밀’을 정당한 방법으로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독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도 ‘비밀’이 가득합니다. 소설에서 고등학생이던 ‘나’는 한국을 찾은 일본의 자매학교 학생인 쇼코를 일주일간 집에서 재우게 되지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를 배웠던 할아버지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나’보다 더 살뜰히 쇼코를 살피며 잘 지내게 됩니다. 이후 쇼코는 할아버지에게는 일본어로, ‘나’에게는 영어로 편지를 꾸준히 써서 보내지요. 대학에 가고 바빠지면서 ‘나’와 쇼코는 연락도 끊기고 관계도 멀어집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가 쇼코와 멀어지는 동안에도 할아버지와 쇼코는 자신의 비밀을 서로에게 내보이며 한동안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한편 <쇼코의 미소>에 실린 또 다른 단편 소설 ‘씬짜오, 씬짜오’에는 마음으로 공감할 수 없는 두 가족의 비밀이 소설 전반에 드러납니다. 말하자면 비밀을 공유할 수 없다는 건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요.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p.89 '씬짜오, 씬짜오‘ 중에서)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 최은영은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하여 7편의 이야기를 이 책에 싣고 있지만 결국 작가는 ‘비밀’이 들려주는 여러 변주를 독자들에게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도 가슴 아픈 ‘비밀’이 등장합니다.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상실감으로 어찌할 바 모르던 부부는 찬바람이 부는 입동의 자정 무렵, 복분자의 붉은 물이 튄 벽에 도배를 다시 하기로 합니다. 어쩌면 부부에게 도배는 죽은 아들을 잊고 새 출발을 다짐하자는 의미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배를 하기 위해 가구를 치웠을 때 그 밑에서 아들의 삐뚤빼뚤한 낙서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잊혔을지도 모르는 아들의 비밀 한 조각이 부부에게 드러난 셈이지요. 부부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벽지를 마저 붙이지 못한 채 오열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도 마찬가지였다.” (p.18 '입동‘ 중에서)

 















‘비밀’은 글로 쓰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말하여지기도 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비밀’은 때로는 마음의 병이 되어 한 사람을 쓰러트리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비밀을 들어주고 그 아픔을 다른 누군가에게 토로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가슴에만 담아야 하는 이도 있습니다. 정신과의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정신과의사 김진세가 쓴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는 정신과의사의 고충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김진세의 산티아고 순례기이기도 한 이 책은 개인이 만들어가는 ‘비밀’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은 음미하는 것이다. 급하게 보내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리는 삶, 비록 지긋지긋한 삶이라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것이지, 실제로 인생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인생을 즐기려면, 마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참맛을 느끼듯, 천천히 살아가야 한다.” (p.31)















나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최진영의 산문집 <어떤 비밀>을 읽고 있습니다. 일부러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삶도 희끗희끗 탈색이 되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알던 당신은 어떤 힘든 일에도 몸을 사리는 법이 없었고, 얼굴에는 늘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당신이나 나나 이미 버거운 나이가 된 게 아닌지요. 나를 만날 때마다 이따금 내뱉는 당신의 옅은 한숨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것은 차마 당신에게 말할 수 없었던 나만의 비밀이었습니다. 최진영의 산문집 중 '대한의 편지'라는 소제목으로 쓴 작가의 문장을 옮겨보겠습니다.


"좋은 사람에게 얼룩처럼 나를 묻히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묻어 있으면 나도 그처럼 좋아질 것 같았거든요. 그래요, 아마도 나는 기억되고 싶었나 봅니다."  (p.344~p.345)

 

오늘은 동지(冬至). 악귀를 쫓기 위해 팥죽을 쑤어먹는 집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지만 당신에게 뜨끈한 팥죽 한 사발 보내고 싶은 날입니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살풍경한 느낌의 오늘 하루를 영원히 기억하고픈 까닭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와 당신은 각자의 ‘비밀’을 짓고, 기억하고, 편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만들어진 ‘비밀’은 차후 당신과 나의 만남에서 서로 교환될 수도 있고, ‘비밀’로 숨겨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의 비밀을 언제든 응원한다는 사실을 당신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