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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마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8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2월
평점 :
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 약해진 기억력은 독서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도 중대한 영향을. 전에도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던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번번이 곤욕을 치르곤 했었다. 그나마 소설 읽기에 약간의 열정이 남아 있었을 때만 하더라도 인물의 이름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 인물 구성도를 자체적으로 그려 소설을 읽는 내내 옆에 놓고 시시때때로 들여다보며 참고를 하곤 했었는데 이젠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일마저 귀찮고 시들해져 모르면 모르는 대로 소설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그런 형편이고 보니 장편소설, 특히 외국의 장편소설을 읽을라치면 입에 붙지 않는 어렵고 복잡한 여러 이름들 탓에 소설의 재미는 한껏 떨어지고 만다.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일지라도 인물 구성이 복잡하면 일단 흥미는 반감되고, 소설의 전반부를 지나기도 전에 숫제 책을 덮어버리지나 않을까 전전긍긍 애를 태우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금단의 마술> 역시 그와 같은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겪고 읽기에 간신히 성공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 중 몇몇은 나의 앓는 소리에 대해 공감하지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도 따지고 보면 많은 편이 아니고, 추리소설의 특성상 줄거리나 주제 역시 간단한 편인데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죽는소리를 한담... 그러나 기억력이 약한 나로서는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전체 내용만 개략적으로 떠오를 뿐 중심인물의 정확한 이름도, 소설의 초반부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잠시 후면 기차가 역에 도착한다. 오후 5시가 조금 지난 시각. 차창 밖을 내다본다. 해는 많이 길어졌지만, 두꺼운 구름이 넓게 퍼져 있어 하늘이 어둡다. 돌아갈 때 비가 쏟아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하고 우카이 가즈오는 생각했다. 5월 황금연휴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맛비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였다. 세월 참 빠르다." (P.24)
소설의 전체적인 얼개는 유명 정치가인 오가 진사쿠를 담당하던 기자 고시바 아키호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물리 분야에 재능이 있는 고시바 신고의 하나뿐인 누나이기도 했던 아키호는 데이토 대학에 갓 입학한 신고의 유일한 혈육이자 후견인이었다. 호텔 스위트룸에 여자 혼자 입실하였다는 점도, 옷도 벗지 않은 채 자궁외 임신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숨졌다는 사실도 못내 의심스러웠던 신고는 누나의 휴대폰에 남아 있던 문자 메시지를 통해 누나가 죽던 날 밤 오가 의원이 그 방에 있었고, 피를 흘리는 누나를 홀로 두고 자리를 피했다고 확신하게 된다. 신고는 어렵게 들어간 데이토 대학을 그만두고 기계공장에 입사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유명한 물리학자인 유가와 교수에게서 전수받았던 레일 건 제작을 서두른다. 누나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나가오카 오사무의 시신이 발견된 지 꼬박 열흘이 지났다.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다. 슈퍼 테크노 폴리스 프로젝트 쪽을 공략하면 뭔가 수확이 있지 않을까 했던 수사본부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추진파 중에 나가오카를 못마땅해했던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프로젝트가 좌절될 경우 크게 손실을 볼 기업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로 보건대 나가오카가 그럴듯한 특종을 잡은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P.118)
오가 진사쿠 의원에 의해 추진되던 슈퍼 테크노 폴리스 프로젝트는 과학 발전을 위한 대규모 개발 계획이었다. 그러나 어떤 개발 사업도 그렇지만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늘 있게 마련이어서 환경보전을 명목으로 개발을 반대하는 측의 르포라이터인 나가오카 오사무가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사건은 엉뚱한 쪽으로 전개된다. 오가 의원의 비리를 추적하던 나가오카는 고시바 신고와 가까운 사이였던, 기계공장의 사장의 딸인 유리나를 통해 신고의 누나 아키호와 오가 의원이 불륜 곤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던 나가오카는 결국 반대파에 속해 있으면서 추진파에게 정보를 제공하던 자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레일 건의 성능과 정확도를 개선하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던 신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레일 건을 실험하던 중 오토바이 한 대를 파괴했던 신고는 경찰들에 의해 재물손괴와 살인 예비음모 혐의로 수배된다. 그러던 와중에 오가 의원의 시구 행사가 잡히고, 신고를 뒤쫓던 경찰들은 바짝 긴장하게 되는데...
"어느새 4월에 들어섰다. 비번이었던 구사나기 팀은 꽃구경을 나서기로 했다. 우쓰미 가오루가 유가와도 초대하자고 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레일 건 사건 이후 구사나기는 유가와를 만난 적이 없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참고인 조사를 다른 수사관이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가와는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입건되었지만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고시바 신고는 기물 손괴 혐의로 기소되었다. 대신 살인 예비죄에 관해서는 무혐의 처리되었다. 구사나기는 타당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P.342)
오전에 쏟아지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찜질방의 열기를 방불케 한다. 언론에서는 요즘 '극한 호우'라는 생소한 단어를 통해 급격하게 변한 최근의 장마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좁은 면적에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 짧은 시간에 한 달치에 맞먹는 비가 쏟아짐으로써 수해에 대한 대비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듯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로 인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게 뻔한 일. 멀리 지구 환경을 말할 것 없이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환경 역시 갈수록 척박해진다. 이렇듯 환경이 나빠지는데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마음 역시 좋아질 리는 없을 터, 홍익인간의 정신은 이제 원시 사회의 구호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상층부에 있는 그들은 '삼부 내일 체크하고'와 같은 말과 짬짬이를 통해 자신들의 배를 불린다. 나는 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져 소설 한 권을 읽어내는 데도 이렇게나 힘이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