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보다 (10만부 기념 행운 에디션)
박여름 지음 / 히읏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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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뭔가 급하게 서둘러야만 할 것 같고, 꼭 해야 할 일을 지금 내가 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곤 한다. 나의 생각이 말(言)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말(言)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형국. 사람의 말(言)이란 묘한 구석이 있어서 오래 쓰다 보면 오히려 나의 생각보다 앞서서 끌고 가는 경우가 더러 있게 마련이다. '사랑해'라고 조용히 읊조리면 차갑기만 하던 손끝으로부터 미지근한 온기가 가슴을 향해 시나브로 밀려오는 것처럼.


박여름의 에세이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보다>는 앉은자리에서 두어 시간이면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책날개에서 찾을 수 있는 작가 소개글에는 '자주 울고 자주 웃는 사람/앞으로도 그러며/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문구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을 뿐 어떠한 신상 정보도 실려 있지 않았다. 다만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작가의 나이를 어렴풋이 짐작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 작가는 이 책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여러 불안, 알 수 없는 슬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새로운 만남 등에 대하여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풀어쓰고 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작가는 지금 푸른 청춘의 관문을 통과하고 있거나 그곳으로부터 멀리 지나쳐오지 않았을 듯하다.


"말이 어떤 이의 마음에 닿아 새싹을 틔우는 거름이 되기도 하고, 잘 자라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불씨 남은 담배꽁초 따위가 되기도 한다. 살아가며 우리가 할 일은 내 삶의 꽃을 피우는데 방해가 되는 꽁초나 쓰레기를 제때 줍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장식용으로 쓸 수 없다. 그런 환경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절대 예쁜 꽃을 피울 수 없다."  (p.183~p.184)


작가는 자신의 일상 속에서 건져 올린 50여 가지의 소제목에 자신만의 감성과 철학을 담은 글을 덧붙임으로써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처진 어깨를 바로 세우고, 갈라진 상처에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준다. 사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은 그 시절의 감성에서 멀어진 까닭에 아련한 추억으로만 기억될 뿐, 작가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인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작가의 충만한 감성이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고, 때로는 나이답지 않은 성숙한 생각에 공감하게도 된다.


"좋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정말 좋은 사람은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 편해지자고 남에게 상처 줘서도 안 되지만, 남을 위해 나를 울려서도 안 된다. 몇 번의 성장통을 겪으며 적절히 마음을 배분하는 것, 그러다 아주 가끔은 나를 더 챙겨도 괜찮은 것, 그게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p.213)


지나고 보면 젊은 시절은 정말 빛의 속도로 빠르게 흘러갔음을 깨닫게 된다. 청춘이란 어쩌면 벼락이 치는 순간처럼 짧고 선명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귀한 순간을 아무것도 아닌 양, 하수구에 물을 흘려보내듯 너무도 쉽게 보내버리는 건 아닌지...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사랑도 하고, 스피노자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청춘을 청춘답게, 청춘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오래 붙잡아둘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나처럼 나이가 든 꼰대(?)들은 누구나 비슷한 어법으로 훈수를 늘어놓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겪는 시련이나 아픔은 당사자에게는 타인과 견줄 수 없는 크나큰 상처이자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빙벽이겠지만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게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였음을 깨닫게 된다.


"헤어지자는 얘기를 했을 때 그들은 모두 기회를 달라 말했고, 나는 돌아갔다. 하지만 사랑을 몇 번 해봤다면 모를 사람은 없지. 이미 한 번 문제가 생긴 관계는 구멍 난 풍선에 바람을 부는 꼴이라 언젠간 지쳐 다시 끝이 나게 되어 있다. 나는 그 풍선을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예쁘게 불고 싶었는데."  (p.18)


벚꽃이 피고 지는 계절. 거리에는 봄을 즐기려는 연인들로 가득하다. 변덕스러운 꽃샘추위를 견뎌온 봄은 이제 한낮 기온이 20도를 웃도는 초여름 날씨로 향하고 있다. 왔는가 싶었던 봄은 이처럼 빠르게 흘러 사라진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마냥 길게만 느껴지던 청춘의 관문도 지나고 나면 흩날리는 저 벚꽃잎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 흔적만 겨우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는 봄이 아쉬워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 그 헛된 수고가 매년 봄마다 이어지고 있다. 박여름의 에세이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보다>는 마음이 헛헛한 사람들을 다독이며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봄이 가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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