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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그것은 이미 전조가 있었다. 목요일 오후부터 시작된 비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까지 이어지더니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들뜬 기분에 찬물이라도 끼얹겠다는 것인 양 바람이 불고 풀풀 눈발이 치고 있었다. 스산한 날씨였다. 목요일부터 시작된 스산한 날씨에 대한 전조는 주말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파트 인근의 중학교 운동장에는 운동을 나온 어느 할머니의 무거운 발걸음이 십여 분째 이어지고 있다. 어두운 구름 사이로 잊혔던 햇살이 문득 고개를 내밀고 거세지는 바람결을 따라 불현듯 사라지곤 했다. 자맥질을 하듯 언뜻언뜻 겨울 햇살이 되살아나는 동안 나는 운동을 하는 할머니의 지친 발걸음을 주시하고 있었고, 발끝에 매달린 삶의 무게에 나의 생각이 잠깐 머물렀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요즘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보다 더 자주 할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원래 할머니는 내게 북쪽과 남쪽의 거리만큼 아주 멀리 계셨던 분이므로 나는 그 부재에 대해 실감이 없고 그러니 마치 살아 계신 듯 느껴지기도 한다. 여전히 실감과는 거리가 있는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점은 이제 비로소 어떤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가까웠든 가깝지 못했든 할머니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찾아든 할머니의 부재, 그 공평한 부재 속에서 '나의 할머니'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말, 그 말을 곱씹는 데서 시작해, 조금씩 그러나 오래오래." (P.21~P.22)
김금희 작가의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었다. 데뷔 11년 만에 펴낸 작가의 첫 번째 산문집이라는 이 책은 데뷔 직후 발표한 글부터 2020년 3월 초 문을 연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글들 중 42편을 뽑아 묶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이야기나 친구와의 일화, 엄마를 잃은 엄마에 대한 관찰과 할머니에 대한 회상, 특이한 택시를 탔던 기억, 출판 노동자 시절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작가의 올곧은 시선에서 재해석된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마치 스산한 겨울 날씨를 견디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어느 할머니의 발걸음처럼 무겁고 힘겨운 일일 터, 그와 같은 작은 발걸음들이 모여 지금의 김금희 작가를 있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덮지 않고 꼭 쥔 채 어른이 되고 마흔이 된 날들을 ㅜ회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손에서 놓았다면 나는 결국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삶의 그늘과 그 밖을 구분할 힘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현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상처를 앓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안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삶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될 것이고, 느끼게 될 것이고, 마음먹게 될 것이며 결국 나가서 걸을 수 있을 것이다." (P.5~P.6 '서문' 중에서)
1부 '언제나 귤이었다', 2부 '소설 수업', 3부 '밤을 기록하는 밤', 4부 '유미의 얼굴', 5부 '송년 산보' 등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애독자들에게 작가에 대한 또 다른 매력을 선물하는 귀중한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소설가의 실제 모습을 소설 속에서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근원적으로 품고 가야 하는 고통이자 딜레마다. 죽음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는 어떻게 사는가만큼이나 중요하다. 죽음을 덮거나 피하지 않고 진정으로 애도할 수 있는 사회 그럴 수 있도록 사회의 공기를 조성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만이 삶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죽음이 고유해질 때 우리 모두는 숫자 속에 숨은 익명이 아니라 고유한 개인이 되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한 이별들은 은폐되거나 덮이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고 말해져야 한다." (P.208)
숨었던 햇살이 제 속살을 내보이며 다시 나타났다. 빈 운동장을 하염없이 걷던 할머니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고 밀려난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목전에 두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익명으로 처리하려 했던 자들, 자신이 얻은 권력을 마치 전리품처럼 인식하여 사적인 욕심을 극대화하려 했던 자들, 그들에 의해 저마다의 고유성을 상실한 채 익명의 죽음을 맞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영혼이 우리를 영화관으로 이끌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었던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한 이별들이 가슴에서 응어리로 맺힌 기억들이 우리에겐 너무도 많았던 게 아닌가. 빈 운동장을 걷는 누군가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워질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며 나는 김금희의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