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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통제구역 ㅣ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세윤 옮김 / 오픈하우스 / 2023년 4월
평점 :
어쨌거나 스토리는 단순하다. 우연히 눈에 띈 악당의 무리를 법과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타고난 능력 하나로 시원하게 제압하여 처단한다는 것. 책의 저자인 리 차일드는 자신이 만든 주인공 잭 리처를 앞세워 비슷한 구조의 잭 리처 시리즈를 27편이나 썼으니 독자를 우롱하는 것도 유분수지 우려먹어도 너무 우려먹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뭐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 궁리를 할라치면 나도 모르게 잭 리처 시리즈에 손이 가는 걸 보면 잭 리처 중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잭 리처 컬렉션의 스물네 번째 이야기 <출입통제구역>을 읽고 말았으니 말이다. 책에서는 역시 우리의 주인공 잭 리처가 195센티미터, 110킬로그램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며 미국 전역을 도는 여행 중에 있다.
군에서 익힌 특출한 상황 감지 능력, 이를테면 주인공의 예리한 촉은 버스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하였다. 같은 버스의 승객이었던 일흔 살 노인의 주머니 속 두툼한 돈봉투를 노리는 한 애송이의 비열한 눈빛이 그에게 감지되었으니 말이다. 잭 리처는 그들을 따라 인구 50만의 소도시에 내리게 된다. 애송이는 노인을 뒤따라가 공격했지만 뒤쫓아온 리처에 의해 묵사발이 된 채 도망친다. 다리를 다친 노인을 부축하여 그의 행선지까지 동행하게 된 리처는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갈등한다.
"너무 늦게 왔다. 염소수염이 돈을 가진 남자를 거칠게 떠밀었다. 노인은 귀에 거슬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 무릎, 머리를 앞으로 한 채 쓰러졌다. 염소수염은 그 위를 덮치더니 아직 움직이는 주머니 속으로 미끄러지듯 능숙하게 손을 집어넣어 봉투를 꺼냈다. 그때 리처가 도착했다. 195센티미터에 110킬로그램의 움직이는 덩어리가, 쭈그린 자세에서 막 몸을 일으키던 호리호리한 염소수염에게 돌진했다. 리처가 어깨를 비틀어 내리치며 염소수염에게 부딪히자 그는 자동차 충돌 테스트에 쓰는 더미처럼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곤두박질쳐 절반은 인도에, 절반은 배수로에 몸이 걸친 상태로 낙하했다.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p.20~p.21)
정의감에 불타는 우리의 주인공은 노인의 딱한 사정과 이를 등쳐먹는 사채업자들의 만행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사실 이 지역은 도시를 관통하는 중앙로를 경계로 우크라니아인과 알바니아인 갱단이 동서로 구역을 나눠 지배하면서 사채업을 비롯하여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함으로써 선량한 시민들의 돈을 갈취하는 법의 사각지대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지역의 경찰이나 소방, 유력 정치인들을 매수하여 자신들의 범죄 사실이나 불법 행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막아 오면서 포르노 영상 유포와 같은 불법 행위를 공공연하게 저질렀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딸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사채를 비롯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노인 부부의 딱한 처지를 돕기 위해 시작된 리처의 작은 응징이 두 갱단을 자극하여 마침내 그들과의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봐, 일어나.” 그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놈들은 곧 일어났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눈을 껌뻑이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리처가 말했다. “거래를 제안하지. 인센티브도 붙어 있다. 나를 태우고 동쪽으로 차를 모는 거다. 가는 동안 너희에게 질문을 하겠다. 거짓말하면 도착해서 알바니아인들에게 넘기겠다. 진실을 말한다면 나는 목적지에서 내려 걸어가고 너희는 차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 그게 인센티브다.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 알겠나?”" (p.174)
물론 범죄 스릴러물이라고 해서 주구장창 총격전과 몸싸움만 이어지는 건 아니다. 리처와 애비의 달달한 로맨스도 등장한다. 그리고 리처와 의기투합한 전직 해군과 해병대 출신 사나이들이 펼치는 대활약도 눈에 띈다. 물론 애비는 정의감에 불타는 리처의 남자다움에 매력을 느끼지만 리처가 자신과 동행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에는 거절을 표한다. 역마살이 낀 리처가 자신의 배우자가 되어 한 곳에 정착한다는 건 애비 스스로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컬렉션은 사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전지전능의 한 인물과 그를 상대하는 다양한 부류의 악당들을 등장시켜 마냥 느려터진 법적 구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자 잭 리처에 의한 시원한 자력구제를 선보임으로써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대리만족 소설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지난 시기에는 잘 읽지 않았던 잭 리처 컬렉션을 현 정부 들어 자주 읽게 되는 건 아마도 집권자 스스로 입으로만 나불대는 '공정과 상식'이 현실에서는 완전히 무너져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를 응징할 잭 리처의 출현을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폭염경보가 발령된 오늘도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