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번잡한 일상을 쉼 없이 살다 보면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처럼 자연을 닮은 맑고 투명한 글이 가득한 책 한 권쯤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우리의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순수함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에 대한 향수도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한 편의 시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슴 절절한 한 편의 소설이 생각나기도 하고,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한 편의 에세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책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이들에게 내린 천형(天刑)! 순수함으로부터의 도피를 도통 용납하지 않는 시대 부적응자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러한 운명을 나는 독서 애호가 중 한 명으로서 기꺼이 순응하며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하듯 책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듯 책 속으로 들어간다. 희망을 품고, 조바심을 낸다. 단 하나의 몸 안에서 수면을 찾고,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침묵에 가닿겠다는, 그런 욕구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런 욕구의 물리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조바심을 내며, 희망을 품는다. 그러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처럼, 일체의 조바심을 몰아내고 일체의 희망에 딴죽을 거는 무언가다. 그것은 위로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유혹하지 않고 황홀감을 준다. 자체 안에서 자신의 종말과 죽음의 슬픔, 어둠을 품고 있는 무언가다. 스스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것에 귀 기울이는 자는 이제 자신이 피신할 데도, 의지할 데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서 해방되어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p.108~P.109)


프랑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크리스티앙 보뱅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겠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어느 날 아침 문득 들었다면 그의 글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와 같은 생각의 저변에는 보뱅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깊은 사유와 자연을 닮은 서정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상업적 작품에만 몰두하는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얕은 지식과 일회성의 사유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비교불가의 위로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울림이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저릿저릿한 느낌과 원시에 가까운 순수로의 무모한 회귀. 고해성사를 하듯 나는 보뱅의 글을 읽는다.


"위대한 책은 그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된다. 어떤 책이 위대하다는 건, 그 책에서 점차 드러나 보이는 절망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책 위에 무겁게 드리워져 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한참을 가로막는 그 모든 어둠을 의미한다. 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 책이 있기 전, 글이 써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p.47)


짧은 서문과 아홉 편의 텍스트를 모아 엮은 보뱅의 산문집 <작은 파티 드레스>는 제목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에세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난해함이나 기이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문장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일상의 황폐함에서 오는 순수함으로부터의 거리일 수도 있다. 일상의 피로에 찌들 대로 찌든 우리네 삶이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 역시 자연의 순수함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오고야 말았던 게 아닐까.


"객관적인 눈으로 차분히 행하는 독서가 완벽한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가 핵심에 이르는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는 책의 검은 광맥을 건드리지 못한다. 책에 담겨 있고 당신의 눈과 삶의 저변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반짝이는 진실의 핵을 건드리지 못한다. 당신의 눈 속, 삶의 저변. 즉 근원에 가 닿는 또 다른 독서만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당신 안에 자리한 책의 뿌리로 직접 가 닿는 독서, 하나의 문장이 살 속 깊은 곳을 공략하는 독서."  (p.48)


힘들고 팍팍한 현실 탓인지 내 영혼에서도 서걱거리는 모래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게다가 이 시대를 책임져야 할 젊은이들 역시 각종 자격증 취득을 위한 수험서나 자기 계발서 등 실용서 위주의 독서만 할 뿐 문학서적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장마가 코앞인데 현실에서 체감하는 온도는 영하의 찬바람이 부는 듯한 것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책을 읽는 건, '고통이 제자리를 찾게 하려는 거'라고 썼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가난한 삶과 그로부터 오는 고통을 통하여 글도 쓸 수 있고, 자신의 고통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마치 꿈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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