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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아이
츠지 히토나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3월
평점 :
재작년 가을, 추석을 코앞에 둔 어느 날 농산물 절도 사건 용의자로 체포된 한 할머니의 사연은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세 살 터울의 언니마저 돈을 벌어 오겠다며 떠난 뒤 호적 등록도 되지 않은 몸으로 75세의 할머니가 될 때까지 줄곧 혼자 살아왔다는 할머니의 사연은 그간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모두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니와 헤어진 후 식모살이와 식당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할머니는 60대에 접어들면서 주덕읍의 한 여인숙에 자리를 잡고 산나물을 캐 장터에서 팔아 생활을 이어왔지만 여인숙 월세 15만 원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할머니는 결국 다른 이의 농작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경찰의 도움으로 주거지와 긴급복지서비스를 받게 되었고 호적 취득 절차도 밟게 되었다고 하는 데, 이와 같은 따뜻한 도움에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 <한밤중의 아이>를 읽는 독자라면 어쩌면 평생을 무적자로 살았던 그 할머니의 사연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렌지 역시 호적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가는 어린 소년이기 때문입니다. 유흥가에서 생활하는 엄마 아빠는 어린 렌지를 홀로 남겨 두었고, 돌봐줄 사람 하나 없었던 렌지는 나카스 전역을 떠돌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가게 쪽에서도 렌지는 귀여운 마스코트가 되었다. 담장을 넘어 어디선지 모르게 찾아오는, 잘 길들여진 남의 집 고양이 같은 존재였다. 엄마 아카네는 클럽에서, 그리고 아빠 마사카즈는 호스트로 밤일을 하고 있었다. 렌지가 태어난 곳도 이곳 나카스였다. 쥬오 거리 일대에서 렌지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간혹 이름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한밤중에 술 취한 어른들 사이를 쪼르르 뛰어다니는 어린애라고 하면 이미 유명 인사였다 나카스 사람들은 그를 '한밤중의 아이'라고 불렀다." (p.36~37)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나카스 파출소에 첫 부임한 히비키는 한밤중에 유흥가 주변을 맴도는 어린 렌지가 그저 불쌍하기만 합니다. 순찰 도중에 렌지를 만나기라도 하면 음료수를 사주기도 하고, 근무가 없는 날에는 렌지가 호적을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을 다방면으로 알아보곤 합니다. 히비키는 아동종합상담센터로, 다시 구청이나 법무국을 오가며 마치 제 일처럼 힘을 씁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부모를 설득해 서류를 제출하라는 형식적인 대답뿐 달리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친구도 없이 나카스 전역을 떠돌던 렌지는 어느 날 자신과 나이가 같은 여자 아이 히사나를 만납니다. 호적이 없어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는 렌지와는 달리 룸살롱을 경영하는 유코를 엄마로 둔 히사나는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버지는 없지만 말입니다.
"요즘 히사나는 내 친아빠는 저런 식으로 눈이 핑핑 돌게 바뀌는 엄마의 남자들 중 누군가였는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일은 깊이 따져 보고 싶지도 않았다. 동시에 가족이라는 것에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았다. 나라는 인간은 아무도 원치 않는데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렌지의 소문은 그런 히사나에게 뭔가 큰 힘이 되었다." (p.136~p.137)
밤거리를 배회하며 나카스 지역의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엄마인 아카네가 출산에 대비해 외가로 떠나게 됩니다. 집에는 이제 아빠인 마사카즈와 렌지 두 사람뿐입니다. 그때 마침 아카네의 전 남편이 찾아와 마사카즈를 폭행합니다. 머리를 크게 다친 마사카즈는 결국 병원으로 후송됩니다. 갈 곳이 없어진 렌지는 외가로 보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카타 지역으로 되돌아옵니다. 멀쩡한 집을 두고 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던 겐타는 자신의 집을 렌지에게 내어줍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렌지를 어린 히사나가 헌신적으로 보살핍니다. 자신의 엄마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생활비를 하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렌지에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사고 이후 밖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던 렌지도 지역 축제인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를 다시 보게 되면서 전에 알던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합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열일곱 살이 된 렌지는 나이를 속인 채 호스트 클럽의 넘버원이 됩니다. 그런 렌지 앞에 어느 날 엄마인 아카네와 여동생 토마가 찾아옵니다. 그 후로 아카네는 매일같이 찾아와 렌지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결국 렌지는 호스트 클럽을 그만두고 요리사인 헤이지 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렌지는 헤이지와 함께 어릴 적부터 그렇게 원했던 야마카사 축제에 참가할 준비를 합니다.
"렌지는 육체나 규칙이나 사회성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영혼, 특별한 요소로 구성된 존재인 것이라고 겐타는 생각했다. 늘 정의를 품고 대했고 순간순간 외경심을 느끼는 일도 있었다. 렌지가 처한 환경에 대해서도 겐타는 정령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렌지를 덮친 슬픈 폭력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도 렌지라면 대처할 수 있다, 성장을 위해 미리 준비된 시련, 숙명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생각에 딱히 걱정도 하지 않았다." (P.324)
유코의 룸살롱에서 일하던 아키네를 감옥에서 출소한 그녀의 전 남편 후미아키가 찾아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렌지도 결국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우리는 어쩌면 서로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각자의 좁은 세상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어떤 큰 사건이 터졌을 때나 겨우 아주 잠깐 타인에 대해 생각할 뿐 대부분의 시간은 오직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지요. 참으로 이기적인 동물이 인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본의 정치인도, 대한민국의 정치인도 모두 일제의 만행에 대해 두 눈을 질끈 감는 것일 테지요. 마치 남의 일인 양 말입니다. 더없이 맑은 봄날, 미세먼지로 대기는 온통 탁하고 답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