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오해는 풀고 가야지.
하루가 다르게 봄기운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내 멧돼지의 단독 행보도 부쩍 늘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포항의 죽도 시장을 다녀왔던가 봅니다. 우리 멧돼지들의 먹성이야 세간에 이미 정평이 난 사실이지만 아내 멧돼지와 나도 다른 멧돼지들 못지않게 먹성이 좋은 편입니다. 시장에 나온 여러 음식들 중에 박달 대게가 아내 멧돼지의 눈에 띄었었나 봅니다. 입맛을 다시던 아내 멧돼지는 주변의 많은 멧돼지들의 시선을 의식한 탓에 체면상 맛있겠다는 말은 못 하고 수족관의 대게 한 마리를 덥석 꺼내 물고는 "얘 이름을 지어줘야 할 것 같아요. 큰도리."라고 시장의 멧돼지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다른 멧돼지들에 비해 도리도리를 심하게 하는 내가 생각났다고 합니다. 박달 대게는 그렇게 '큰도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내 멧돼지는 입에 물었던 '큰도리'를 수족관에 다시 넣어주면서 "이건 팔지 마세요."라고 하자 상인 멧돼지 왈, "예, 잘 보관할게요." 하더랍니다. 그쯤하고 떠났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아내 멧돼지나 나나 먹성이 오죽 좋아야지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나 봅니다. 아내 멧돼지는 기어코 큰도리 한 마리를 쪄 달라고 부탁해서 서울로 가져왔습니다. 다른 멧돼지들에게는 리더 멧돼지인 내가 좋아한다는 핑계를 대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도 아내 멧돼지의 동물 사랑 때문이 아니라 간편 도시락 대용이라는 것을 알 만한 멧돼지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와 아내 멧돼지의 먹성 때문인 셈이지요.
어떻게든 세계 최강의 날리면 멧돼지의 눈에 들기 위해 리더 멧돼지에 취임한 직후부터 애를 써왔던 나는 결국 날리면 멧돼지의 꼬붕인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부하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기시감 멧돼지의 선조인 일본 조폭 멧돼지들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와 강제 노동에 시달렸던 우리나라 멧돼지들에 대한 일본 멧돼지들의 사죄와 배상을 일절 요구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똘마니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와 같은 발표를 하자 일본은 물론 미국의 멧돼지들도 환영 일색이었습니다. 기시감 멧돼지를 비롯한 그의 똘마니들은 이게 웬 떡이냐는 듯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겉으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관리에 여념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물론 강제징용에 끌려갔던 우리나라의 늙은 멧돼지들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적당히 몇 푼 쥐어주면 못 이기는 척 받고 말겠지요. 설사 안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달리 무슨 대책이 있겠습니까. 천박한 것들! 나를 지지하는 일부 나의 똘마니들 중 한 사람은 "식민 지배받은 나라 중에 지금도 사죄나 배상하라고 악쓰는 나라가 한국 말고 어디 있나"라고 했으며 또 다른 멧돼지는 "나는 기꺼이 친일파가 되겠다."는 말로 지지를 표명하고 어떤 목사 멧돼지는 일장기를 흔들며 나를 응원했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기시감 멧돼지에게 넙죽 엎드린 셈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나를 지지하는 똘마니들의 선조들은 일본의 은혜로 이 자리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아, 요즘 참 나에 대한 세간의 오해가 깊어지는 듯해서 말인데 짧게 해명을 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모든 요직을 예전 나의 뒷골목 똘마니들로 채우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사실 그것은 일부러 그들만 골라 임명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의 전반적인 국정운영이 대부분 탈법이거나 불법인 까닭에 나의 임기가 끝나면 요직에 임명되었던 그들 모두 감옥에 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요직에 지명된 일반 멧돼지들 대부분은 지명을 고사하거나 숫제 지원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나마 뒷골목 출신의 똘마니들은 그들 후배들이 버티고 있는 한 적어도 감옥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여 내가 지명하는 순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뒷배를 믿고 있는 까닭에 내가 임명한 요직을 수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도 이런 현실이 영 개운치 않고 답답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 점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나의 불법이나 탈법적인 국정운영을 앞으로 지양하거나 개선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어제는 우리 편 무리의 대표 멧돼지를 선출하는 날이었습니다. 결국 내가 원했던 멧돼지가 당선되었고 그는 나의 1년 선배이기도 하지만 선거 기간 동안 그가 보인 행보는 참으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내가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당선되기 힘들었을 듯합니다. 앞으로 나는 대표 멧돼지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혼쭐을 내 줄 생각입니다. 물론 그의 돈생은 비리가 워낙 많아서 내 말을 듣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테지만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저간의 사정을 구구절절 밝히는 이유는 쌓인 오해는 풀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날리면 멧돼지가 나를 초청하는 걸 보면 나는 조만간 그의 심복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