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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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라는 말을 이따금 듣게 된다. 죽고 못 살 것 같은 각별한 사이라 할지라도 막상 한 사람이 죽고 나면 남겨진 다른 한 사람도 곧바로 따라 죽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서 산 사람은 나름 제 살 길을 찾게 된다는 뜻일 게다. 힘은 들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 어떤 구분보다 명확하고 냉정하여 산 사람의 시간에 죽은 자의 시간이 더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에 아무리 각별한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산 사람의 삶의 영역에는 들어올 수 없는, 영원한 아웃사이더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림이나 번복이 불가능한 이별의 절대성으로 인해 죽음은 종종 소설의 흔한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같은 이유로 인해 독자들은 매번 그 쓸쓸한 풍경에 애달파하기도 한다.


"대체 왜, 엄마의 엄마라는 사람은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 자살 따위를 했을까. 얼른 설 연휴가 끝나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직장에 돌아갈 수 있고, 내 자신의 일상이 정체 없이 지속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 터이다."  (p.29)


섣달 그믐날 밤, 엽총으로 자살을 한 세 노인으로부터 이야기가 펼쳐지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속으로 들어가 보자. 1950년대 말에 미술 관련 서적을 다루는 출판사에서 처음 만난 시노다 간지와 시게모리 츠토무, 그리고 모임의 유일한 여성인 미야시타 치사코는 회사가 망한 후에도 '공부 모임'이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끈끈한 인연을 이어왔다. 물론 각자의 인생이 있다 보니 만나는 빈도가 떨어졌던 시기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10년 전 간지가 아내와 사별한 후 아키타 현으로 이사를 간 뒤로는 공부 모임이 생존 확인 모임으로 바뀌었고, 그들 모두는 이제 80살이 넘은 노인이 되었다. 간지가 86세, 츠토무가 80세, 치사코가 82세.


죽은 세 노인의 이야기는 시간의 역순으로 자살 직전의 순간까지 펼쳐지고, 세 노인의 유족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이 자살한 순간부터 그 이후의 시간들이 시간의 순서대로 교차하면서 펼쳐진다. 그러다 보니 산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어떤 특별한 주제도 없이 끝없이 이어진다. 시노다 간지의 아들과 딸 가족, 덴마크로 유학을 떠난 손녀의 이야기 등에 더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츠토무가 살아생전 인연을 맺고 지냈던 가와이 쥰이치를 비롯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치사코의 딸 로코와 그녀의 딸 도우코 및 아들인 유우키. 소설은 그들의 삶을 마치 스케치하듯 훑고 지나가지만 간지의 손녀인 하즈키와 이혼을 한 후 어린 남매를 두고 나와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했던 로코와 그로 인해 친엄마인 로코와는 인연을 끊고 살았던 유우키 그리고 남동생만 예뻐하는 친가에서 뛰쳐나와 외할머니인 치사코로부터 도움을 받고 자란 도우코의 삶에 주목한다. 도우코는 결국 독신의 몸으로 소설을 쓰며 살고 있다.


"그게 그렇지도 않다고 도우코는 생각한다. 성인이 된 이후의 자신이 보는 한 엄마의 연애는 늘 일종의 체념이 지탱해 주고, 따라서 상처 입는 것도 비극적인 것도 오히려 상대방이다, 딱하게도."  (p.100)


에쿠니 가오리는 이렇듯 다양한 인물들을 자신의 소설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이런 삶도 혹은 저런 삶도 하나의 삶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후 덴마크로 떠난 하즈키는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죽은 세 노인과 친분이 있었던 로코에게 메일을 보낸다. 뿐만 아니라 로코의 딸인 도우코의 소설도 재미있게 읽었노라고 말한다. 한편 이 여자 저 여자와 사귀며 문란한 생활을 이어왔을 듯싶은 츠토무의 삶은 그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기억과 애도 속에 새롭게 평가되기도 한다.


"말을 이으려던 치사코를 츠토무는 가로막는다. "촌스러운 말은 하지 않기. 선택할 수 있는 건 '언제'냐는 것일 뿐, 그건 만인에게 공평하게 오는 거니까." 치사코는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하고 속으로 말한다. 나는 돈은 있지만, 돈이 있어도 갖고 싶은 게 없어져 버렸어. 갖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사람도, 이곳엔 이제 하나도 없어."  (p.153)


어차피 삶은 자신의 손안에 죽음의 그림자를 그러쥐고 사는 것이지만, 그게 두려워서 죽음의 실체가 현실에서 드러나도록 자발적으로 혹은 선제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경우는 드물다. 설령 자신의 삶이 고되거나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지병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의 실체를 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현실에서 종종 접하게 된다. 그날의 사건 사고를 전하는 뉴스를 통해 혹은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어느 작가의 소설을 통해...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의 포기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크나 큰 상처가 되기도 하고, 어두운 그늘을 안겨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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