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말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당연하고도 일반적인 선언이라고 여길지도 모르는 이 문구를 우리는 다만 불편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적어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에 있는 이 조항은 그저 수사적인 헌법 조항으로만 머물러 있다는 데 이견이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2007년 차별금지법이 제출된 이래 수차례 무산됐던 것으로도 모자라 21대 국회에서도 국회 심사기간이 2024년 5월 29일까지 연장됐다. 사실상 폐기나 다름이 없다.

 

우리는 이렇게 미개한 나라에 살고 있다. 아무도 평등을 실천하지 않으면서(혹은 실천하려는 의지마저 없으면서) 민주주의를 논하고, 대한민국의 인권을 주장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중앙대 독문학과 교수이자 독일유럽연구센터 소장인 김누리 교수가 파헤친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사실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톺아봄으로써 우리의 문제를 독일처럼 '상식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저자의 바람이 책에 담겨 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정치지형을 가진 나라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한국 정치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한 것이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권력을 분점해 왔습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오늘날 정치 민주화와 경제성장,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이 된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p.182)

 

책에서 저자는 촛불혁명을 통한 민주주의 최선봉에 선 대한민국의 실상을, 거듭되는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매년 자살률 1위, 출산율 최하위, 심각한 불평등 구조를 갖게 된 원인을 파헤친다. 저자는 이에 대한 근본 원인을 68혁명의 부재와 기만적인 정치 구조, 맹목적인 야수 자본주의, 분단체제에서 찾고 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창했던 68혁명이 전 세계를 뒤흔들며 사회 전반의 문제들을 노정하고, 이러한 문제점을 '상식적으로' 해결해가는 동안 박정희 독재 정권의 억압 속에 있던 대한민국은 약 50년의 '문화 지체 현상'이 발생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사실 박정희라는 인물이 한국 사회에 끼친 해악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영락없이 박정희와 만나게 됩니다. 지역감정도 박정희가 만든 작품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지역감정이 없었습니다. 윤보선과 박정희가 대선에서 맞붙었을 때 박정희가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곳이 호남 지역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박정희가 '농민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윤보선은 명문 양반 가문 출신이었지요. 이때까지만 해도 영호남 갈등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p.93)

 

1989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상황을 지켜보았던 저자는 독일 사회에 뿌리내린 민주적 질서(경쟁 없는 학교, 등록금과 생활비 전액이 무상인 대학, 이사회의 절반이 노동자인 기업 등)를 부러워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복지 정책과 사회적 정의. 타국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본 모국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저자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독일과 대한민국의 역사와 교육ㆍ정치ㆍ사회ㆍ문화를 꼼꼼히 비교하며 그 원인을 하나씩 밝혀낸다.

 

"한국에서는 미국과 갈등이 생기면 수구 세력이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들은 정말 터무니없이 낡고 시대착오적인 냉전 논리로 엄청난 공격을 퍼부어댑니다. 그러면 민주개혁 세력은 그것이 두려워서 끊임없이 뒤로 물러나 수세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런 관행이 지금까지도 수십 년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관행을 끝낼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p.253~p.254)

 

지금은 감옥에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정권 초기였던 2008년 1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접했을 당시 "오바마는 시카고의 자동차 업계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됐는데,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라는 말을 했다가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부시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을 옆에 태운 채 체면 없이 골프 카트를 운전하기도 했던 그는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추앙하거나 지지하는 국민이 존재한다는 건 우리나라가 얼마나 비민주적인 환경 속에 처해 있는가를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당 역시 보수라고 말한다. 소위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은 수구에 속하는 극우 세력이라고 본다. 그들 간에는 대부분의 정책이 비슷하거나 같고, 다만 대북 통일정책에서만 다르다고 한다. 맞는 지적이다. 그런 까닭에 어느 날 국민의힘 당원이었던 어느 정치인이 민주당 당원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민주당 당대표였던 자가 국민의힘 화합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념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적 이익과 정치적 욕망만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차별금지에는 반대하는 해괴한 현상, 인권을 말하면서도 주 120시간 노동을 주장하는 어느 대선 후보,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을 덮어두고 두 나라의 미래만 걱정하는 현실, 권위를 내세우면서 수평적 관계를 말하는 본말전도의 논리, 평등한 교육을 말하면서도 반값 등록금에는 인색한 정치권, 상위 2%의 국민을 위해 종부세를 없애겠다는 어느 언론과 정치인들. 우리는 이러한 비민주적인 잔재 속에서 민주주의를 논하고 있다. 저자 역시 이와 같은 답답한 현실을 높디높은 벽으로 인식하였을 터,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로 회귀하려는 수구 세력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 비민주적인 환경을 지속하며 민주적 정권교체만 바라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