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감정'이라는 필터를 끼고 사물이나 현상을 본다. 누구나 예외 없이 그렇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를 통하여 전달된 사실은 이미 나의 감정으로 한 꺼풀 포장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듣게 되는 어떠한 사실 역시 그러하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도 실생활에 있어서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곤 한다. 어쩌면 당신과 나 사이의 공감이라는 건 하나의 명확한 사실을 향한 당신과 나의 '감정 필터'가 우연히 일치했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다양한 '감정 필터' 중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것을 꺼내 들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짜릿한 흥분을 느끼기에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가 창궐한 어느 시점부터 점심은 대개 도시락이나 배달 음식으로 대체되었는데 어쩌다 점심 대열에 동참하지 못하는 날이면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운 식당을 방문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식당은 대체로 한산한 편이지만 그래도 주변의 다른 식당보다 손님이 많은 식당은 저절로 움츠러들게 마련, 예전 같으면 오히려 손님이 많은 식당으로 몰려들곤 했는데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다. 딱히 먹고 싶은 음식을 정하지 못하고 이 식당 저 식당 간판만 훑다가 마침내 결심을 하고 들어섰던 식당, 동행했던 동료 왈 "다른 데 가서 드시죠? 주차장에 보니까 교회 승합차가 서 있던데 아무래도 교회 사람들이 온 식당에서는..." 하면서 돌아서 나오는 게 아닌가. 우리는 주문도 하지 않고 식당을 나왔고, 근처의 작고 허름한 중식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 교회는 마치 악의 온상인 양 변해버렸다. 빠른 교통수단이라는 이유로 위험을 무릅쓴 채 자동차를 운행하는 것처럼 종교라는 이유로 교회를 버리지 못하는 듯 사람들의 인식이 변해버렸다. 교회도 이제 '필요악' 중 하나로 바뀐 셈이다.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향해 하나의 '감정 필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와 같은 습관은 한동안 지속된다. 고착화된 사회적 관습은 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내일모레면 성탄절, 예년 같으면 나도 성탄 미사에 참석하여 오랜만에 보는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식사라도 함께 했을 텐데 올해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듯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아픈 것이 건강한 것’이라고 했다. “회복기는 우리에게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은 가까운 미래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만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재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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