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녹나무의 파수꾼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추리소설을 탐독하는 독자들에게 있어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하나의 장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화려함이나 작가만의 독특한 문체도 없이, 평범하거나 지극히 건조한 문체를 꾹꾹 눌러씀으로써 이야기의 얼개를 만들고, 단순한 이야기와 구성만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전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추리소설이라는 특성상 평범한 문장과 구성만으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몰입도와 긴장감을 극대화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녹나무의 파수꾼>은 범인을 쫓고 범죄의 실체를 파악하는 추리소설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는, 어쩌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가까운 감동 소설의 하나로 읽힌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의 측면에서도 나미야 잡화점이 거대한 녹나무로 옮겨왔을 뿐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이나 인상에서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떠올렸던 건 비단 나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물론<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대로 빼다 박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레이토는 천애고아로 힘겨운 생활을 영위하던 중 다니던 직장에서마저 해고된 채 절도죄로 감옥에 갈 처지였다.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던 급박한 처지의 그에게 누군가로부터 한 가지 제안이 들어온다. 변호사를 써서 감옥에 가는 상황은 면하게 해줄 테니 시키는 것을 군말 없이 따르라는 것. 그렇게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녹나무의 파수꾼'이 된다. 지름이 5미터에 높이도 20미터는 넘을 듯한 거목의 옆구리에는 거대한 구멍이 나 있고, 나무 기둥 안쪽에는 한 평 반쯤 넓이의 동굴 같은 공간이 있어 녹나무의 영험한 기운을 믿는 사람들은 '녹나무의 파수꾼'으로부터 밀초 한 자루를 제공받아 자신의 후손에게 남길 유언이나 생각들을 녹나무에 기념(祈念)하고, 지명된 후손들은 선조가 남긴 유언이나 생각을 녹나무로부터 수념(受念)하게 된다. 다만 '녹나무의 파수꾼'은 예약한 사람들의 일정을 관리할 뿐 그들의 의식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른 채 '녹나무의 파수꾼'이 된 레이토는 자신을 파수꾼으로 지명한 사람이 그동안 얼굴도 모르는 채 살아왔던 이모 치후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야나기사와 가문의 상속자였던 치후네는 레이토의 어머니인 미치에와는 배다른 자매였다. 유부남과의 불륜을 통해 아이를 갖게 된 미치에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서도 인연을 끊은 채 철저히 남처럼 지내왔던 치후네는 하나 있는 조카를 바른길로 인도함으로써 죽은 미치에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던 것. 야나기사와 가문의 사업을 부흥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던 치후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왔던 까닭에 자신이 죽고 난 후 유일한 상속자인 레이토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런 말 말고 상상을 해보도록 하세요. 이 세상은 피라미드고 사람은 그것을 형성하는 돌멩이 하나하나예요. 피라미드 전체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는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상상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위를 향하는 것도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레이토 하기 나름, 레이토의 자유예요." (p.530)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순찰을 돌던 레이토는 여대생인 유미와 마주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의 최근 행보가 수상하다고 여긴 유미는 아버지를 쫓아 여기까지 왔던 것. 호기심이 발동한 레이토는 파수꾼으로서의 책무도 잊은 채 유미를 도와 유미의 아버지인 사지 도시아키의 행적을 파헤치게 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레이토와 유미는 기념을 마친 사지 도시아키에게 들키고 마는데...
"기념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도 꽤 많을 것 같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념이 그 집안의 오랜 관습인데 그걸 자꾸 안 한다고 했다가는 주위에서 뭔가 뒤가 구린 거 아니냐고 의심할까 봐서. 거꾸로 말하면, 당당하게 기념을 하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는 어떤 거짓도 거리낄 것도 없다고 주위에 과시하는 일이 돼." (p.484)
소설은 주로 레이토와 치후네, 유미와 그녀의 아버지 사지 도시아키, 기념을 하기 위해 억지로 끌려오는 오바 소키 등 세 가족의 가족사에 얽힌 비밀과 그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끈끈한 애정과 인간애, 삶의 덧없음과 희망 등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될 삶의 희로애락이 소설 전체에서 이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끝날 것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한순간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자신의 삶과 사상을 언어가 아닌 어떤 다른 형태로 자신의 뒤를 이을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화려했던 삶의 이면에 숨겨졌던 밝힐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 그리고 자신의 솔직한 소회와 감정 등 삶 전체의 기억을 누군가에게 가감 없이 전할 수는 없을까 하는 작가의 보편적인 상상이 이 소설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가 선조로부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어쩌면 남겨진 기록이나 문서화 된 유언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으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헌신하며 때로는 눈물을 삼켰던가 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록 너머의 유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