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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궂은 날씨였다. 길지 않았던 설 연휴를 시샘하듯 온종일 지척지척 겨울비가 내렸고, 바람마저 사뭇 거칠었다. 내내 어두웠기에 실내에서도 하릴없이 불을 밝혔다. 안온한 우울이 축축하게 묻어나는 오후, 아슴아슴 쏟아지는 졸음을 억지로 쫓아가며 책을 펼쳤다. '그래, SF 소설을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지.' 하는 생각이 슬몃 들었던 것이다. '미래를, 혹은 과학을 논한다는 건 언제나 황량한 느낌이 들게 마련이니까. 메마르고 거친 느낌을 중화하는 데는 역시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끈적끈적한 우울이 방안 가득 퍼지는 날씨가 좋지.' 가족들과 헤어져 숙소로 복귀했던 나는 그렇게 내처 책을 읽었다. 쓸쓸함을 넘어 청승맞은 느낌마저 감도는...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구매했던 건 열흘도 더 지난 일이었다. 메마른 날씨로 인한 건조한 분위기 탓이었던지 아니면 일이 바쁘다는 핑계가 발목을 잡았던 것인지 좀처럼 독서에 속도를 붙이지 못했던 나는 두 자리 숫자의 페이지를 겨우 넘긴 채 책상 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위치만 바꿔놓고 있었다. 그렇게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할 듯한 위기를 겨우 막았던 건 어제의 궂은 날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울한 감정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그런 날씨에 혼자라는 외로움과 커피 한 잔이 더해져 나는 그만 우울함에 취해 정신마저 몽롱해진 기분이었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그러니까 이건 어차피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 (p.214 '감정의 물성' 중에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는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비롯하여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등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포스텍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생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김초엽 작가는 1993년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비해 지극히 세련되고 정제된 문장과 자신의 전공을 십분 살린 전문적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멋들어진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SF소설은 몇몇 마니아 집단을 제외하면 독자층이 그닥 두껍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SF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인간 존재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파헤치는 테드 창과 같은 걸출한 작가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 역시 테드 창의 작품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SF소설 마니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SF소설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아보지 못할 세상, 다음 세대나 그다음 세대나 겨우 살아볼 수 있는 세상을 지금 세대가 겨우 맛보기로 미리 앞당겨 살아보는 것이기에 인간 생명의 유한함에 대한 한탄 혹은 인생 자체의 덧없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를 철학적 전제로 하는 SF소설은 소설 전반에 흐르는 감정이 '우울'일 수밖에 없고, 나 역시 비슷한 성향의 인간이고 보니 SF소설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지. 언젠가는 이곳에서 우주선이 출항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슬렌포니아 근처의 웜홀 통로가 열리지 않을까……. 자네에게는 흘러가는 시간이 붙잡지 못해 아쉬운 기회비용이겠지만,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아니라네." (p.177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김초엽의 소설은 SF소설의 기본적인 특성을 잘 살린, 말하자면 기본기에 충실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만 하더라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안나는 냉동 수면의 '안티프리저'라고 불리던 유기물질 혼합 용액을 연구하던 과학자로서 남편과 아들을 먼저 외계 행성인 슬렌포니아로 떠나보내고 혼자 지구에 남아 남은 연구를 계속하다가 과학의 발전으로 슬렌포니아로 가는 항로가 영영 끊겨버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불쌍한 노인이다. 자신이 개발한 딥프리징 기술을 통해 동결과 해동을 반복하면서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이 출발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안나는 오늘도 폐기 예정인 우주 정거장에서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다. 삶의 영역이 우주로 확장되었지만 인간의 생명이 유한한 것도, 과학의 발전이 인간에게 반드시 기쁜 일만 선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다른 작품에서도 감지된다. '스펙트럼'에 등장하는 할머니 과학자도, 공생 가설에 등장하는 류드밀라도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잊혀진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잊지 않는다. 과학이 비록 인류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제공하고는 있지만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를 되살리지는 못한다는 것을 곰곰 되새기면서.
"순례자들은 누구를 사랑했을까. 그들은 남미에, 서부 미국에, 인도에, 모두 흩어져서 살겠지. 그들은 아주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러 방식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냈겠지." (p.53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에서)
SF소설이라는 게 본디 과학을 통해 한계 너머의 세상을 갈구하면서도 사랑, 희망, 그리움 등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속성을 이해하려 드는 것처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과 한계 내에서 안주하려는 이중적인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SF소설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날씨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예컨대 맑고 건조한 날씨에는 SF소설에 손이 가지 않다가도 어제처럼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방안 가득 우울이 내려앉은 날에는 내가 닿을 수 없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멀고 먼 원시 과거의 누군가를 향해 따뜻한 악수를 청하고 싶은 것이다. SF소설은 그렇게 쓰이고, 또 그렇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