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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을 팝니다 - 왠지 모르게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의 비밀
신현암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9월
평점 :
나이가 들수록 '설렘'이 사라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럴 수밖에. 그만큼 경험이 많아진 탓이고, 이미 알고 있거나 한두 번 가본 곳을 다시 찾았을 때 처음 느꼈던 설렘은 반감되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설렘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같은 장소, 같은 사람을 만날지라도 매 순간 처음의 설렘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설렘을 느끼기 위해 굳이 다른 장소, 다른 사람, 다른 음식을 경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도 '나이가 들수록 설렘이 사라진다'는 말이 마치 사실인 양 하는 데 한몫하는 듯하다. 말하자면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설렘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엄밀히 말하자면 영혼이 깊어질수록) 설렘의 대상이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차츰 옮겨질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시시한 나뭇잎이나 작은 꽃잎을 보면서 미처 몰랐던 자연의 신비에 가슴이 두근거리곤 하니까 말이다.
신현암 팩토리8 연구소장이 쓴 <설렘을 팝니다>를 읽으면서 내가 받았던 느낌은 사람은 여전히 시각적인 정보를 통한 감성의 자극에 많은 부분 지배되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정상인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말이다. 30년 동안 삼성과 CJ의 마케팅 담당자로, 프로젝트 기획자로, 삼성경제연구소 책임연구자로 일해 온 그의 경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단 한 번도 마이너의 세계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고자 2018년 한 해에만 102일간 일본에 머물렀습니다. 설렘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자동차로 가려면 도쿄에서 여덟 시간 걸리는 아오모리현 이나카다테(논에 다른 색의 벼를 심어 나폴레옹, 메릴린 먼로 등을 형상화한 라이스 아트로 유명한 곳)부터 야마구치현 산골짜기의 조그마한 양조장, 히로시마현의 숨겨진 한천 전문점 등을 다녔습니다. 모두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이 모두를 책에 담고 싶었지만 지면의 한계상 도쿄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p.14 '머리말' 중에서)
책의 내용과는 다른, 살짝 샛길로 빠진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나는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사실 책이라는 게 문자를 통한 일종의 환상을 독자들 머리에 심는 일인데, 이에 더하여 아무런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전자책으로 읽을 경우 모든 게 다 환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이의 질감을 수시로 맛보면서 지금 내가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작은 위안 혹은 안정감을 얻곤 한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이런 물리적 현실 세계를 환상의 세계로 점점 치환해가는 현상을 보이곤 한다. sns를 통해 알게 된 맛집을 직접 방문했을 때의 실망감은 다들 한두 번쯤 겪어보았을 터, sns라는 환상과 물리적 세계의 간극은 점차 확대되는 추세이다.
각설하고 다시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이 책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쿄의 21개 공간을 분석하고 한 번 방문했던 고객이 그 공간을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이유를 밝힘으로써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의 비밀, 말하자면 설렘 전략을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략은 전통 경제학의 기본 전제인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전제를 무력화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과학의 발전은 환상의 세계를 넓혀가는 경향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식당은 가장 겸연쩍을 수 있는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대면 상황을 배제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50분을 '한 끼 알바'에 할애한 뒤 식권을 붙이고 가면 그만입니다. 그 식권이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때에 사용하면 됩니다. 서로 만나지 않기에, 식권을 제공하는 사람의 진정성은 돋보이고 받는 사람의 불편함도 없습니다." (p.82)
일본 아베 총리의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관계의 악화는 일본 관광에 직격탄을 날렸고, 우리나라 관광객의 대부분은 동남아나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런 마당에 '왠지 모르게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의 비밀'이라는 부제로 일본 도쿄의 21개 핫플레이스를 소개하는 것은 어쩌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sns의 발달로 전국 맛집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맛과 가격의 가성비만 따질 게 아니라 소비자의 '설렘'을 기본 마케팅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는 게 아닐까. 굳이 도쿄를 방문하라는 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는 게 좋지 않은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정원 규모는 5000평 정도로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정원 중심부로 들어가면 다실도 있고 연못도 있습니다. 오감을 모두 끌어올려 정원을 즐겨봅니다. 크게 심호흡을 합니다. 울창한 숲 덕분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봅니다. 새소리,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취합니다. 손으로 이것저것 만져봅니다. 돌, 나무, 풀 어느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 거닐어도 좋습니다. 복잡한 도쿄의 한복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하면서 말이죠." (p.270)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곳에는 사람이 덧입힌 인공의 조형물이 하나 둘 추가되기도 하고,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추억이 더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공간은 사람에 의해 덧입혀진 환상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은 무형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은 공간이라는 물리적 세계를 점차 환상의 세계로 뒤바꾸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엊그제 들렀던 괴산 문광의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지금도 여전히 생각나는 까닭은 그 공간에 담긴 내 영혼의 시간이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