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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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를 갖는다는 것은 곧 후줄근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폼나고 멋져 보이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어차피 자신의 일상은 추레하고 너저분한 어떤 것으로 인식될 뿐 일상 자체에서 활력을 얻는 사람은 없는 까닭에 우리는 언제든 이 넝마와도 같은 후줄근한 일상을 과감히 벗어던질 기회를 엿보게 마련이다. 등산을 하든, 독서를 하든, 음악회에 참석하든, 혹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불법적 행위(이를테면 마약이나 매춘과 같은)에 가담을 하든 원인은 모두 우리의 일상 자체가 너무도 따분하거나 빈약한 데서 오는 결과물이 아닐까. 비록 그 형태가 다를지언정 나른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런 직업이 없는 백수의 욕망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주야장천 에세이나 리얼리즘 소설만 읽다가 이따금 판타지 소설이나 역사소설에 눈길을 주는 이유도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욕망에서 보면 다 이해가 된다.

 

그렇게 보면 서철원의 소설 <최후의 만찬>은 독서가의 일탈에 딱 들어맞는 소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려 책을 선택한 이도 더러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현대가 아닌 조선 정조 시대를 축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기존의 제도와 풍습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취하는 다양한 욕망의 스펙트럼을 매우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사기에 가까운 자기계발서에 찌든 대한민국 대다수 독서가에게 일말의 탈출구를 제시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 오래전 풍남문 앞에서 희디 흰 상천上天으로 밀려나간 두 선비의 삶과 믿음과 십자가의 희망을 생각하면, 삶은 문학보다 어려워지고, 문학은 구원만큼 멀어진다. 구원의 삶이 멀어질 때 서쪽 하늘 별이 된 자들의 숨소리가 이 시대의 오류에 떠밀려 한 점 구름으로 밀려오던 환영은 분명 꿈일 것이다. 그 삶의 거리에 쌓여 있는 삶의 흔적은 미망未忘의 자국일 뿐인데, 격동과 불굴의 말들이 엉키어들면 저 먼 시대 유자儒者들이 남긴 유언은 밤하늘 별빛보다 뚜렷이 들려온다." (p.434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은 신해년(1791년, 정조 15년)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례를 지냈다는 이유로 취조를 당하고 결국 완산 풍남문 앞에서 처형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취조를 담당했던 사헌부 감찰어사 최무영은 윤지충의 집에서 발견된 그림 한 점이 있음을 정조에게 보고한다. 열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즐기는 그림. 윤지충의 말에 의하면 예수와 열두 제자의 식사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모사본인 이 그림을 본 정조는 서학과 유교가 충돌하는 난세의 어려움을 풀고자 도화서 별제 김홍도를 시켜 그림에 대해 검토하라고 지시한다.

 

"임금의 의도를 김홍도는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림을 그린 자와 감상자 사이의 거리는 천차만별이었다. 그 사이에 얕거나 깊은 강이 지날 수 있으며, 가깝거나 먼 산이 가로막힐 수 있었다. 앞이 비치는 투명한 천으로 덮여 있거나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흑단으로 가려질 가능성도 많았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사람들의 머리에 도는 이상과 맞물리기 쉬운 소재이며 시대와 섞이기 좋은 재료였다. 그 때문에 그린 자와 감상자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p.309)

 

소설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와 당시의 실권을 장악했던 노론 세력이 등장한다. 서학의 유입으로 유학의 근간이 흔들리고 이로 인해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였던 정조와 순교를 지켜본 정약용의 나약해지는 신념을 대비시킴으로써 하나의 사건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는지 잘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새로운 이념이나 정치 철학, 혹은 신흥 종교가 그 시대의 기득권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치며 이를 도입하기 위한 신지식인들의 반응은 또 어떠했는지 작가는 소설 속에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선 후기 정조 시대의 천주교 탄압을 다룬 그렇고 그런 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무엇보다 문장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적 울림이 좋았고,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 얽힌 비밀이 있었음을 밝히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소설을 극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작가가 창조해낸 여섯 탈춤패 초라니 암살단과 같은 가상의 인물들 역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여섯 외인이 훔친 세상의 향기는 악의 집행이었을 것이다. 악을 과시함으로써 선을 밝히는 악의 집행이었을 것이다. 여섯 외인이 사면한 악의 진실은 더럽고 추한 냄새를 씻어내려 함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사라진 향기를 되찾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악취를 밀어내고 선으로 물든 깨끗한 향기를 내보내려 한 사투였을 것이다." (P.404)

 

전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유일한 국가 조선.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조선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유교의 전통을 잘 알면서도 신념과 양심에 따라 서학을 수용하고 자신의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조선의 선비들이 새삼 대단하게 보이는 건 소설 한 권이 단순히 재미로만 읽히지 않았다는 반증이리라.

 

역사의 진보란 계절의 순환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 속에는 익숙함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인간의 잠재된 욕망, 그 작은 일탈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후줄근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변화의 물꼬를 트고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어떤 것들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사실.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친일 후손들의 공고했던 기득권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는 요즘, 그들의 거대한 반격이 검찰과 언론, 거대한 정치세력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몰아치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나른한 일상을 결코 오래도록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기에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서학이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으로 인정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후줄근한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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