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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시간으로부터 튕겨져 나온 삶의 파편들은 저마다의 색깔과 고유의 무늬를 지니게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들을 수도 없는 고유의 곡조와 리듬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설은 삶의 악보이자 스스로 음을 내는 연주곡인 셈입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마치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노래가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 불리어지고 그 과정이 마침내 내 눈과 귀를 통해 확인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히피(Hippie)>를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는 주위를 둘러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인간의 눈에 보이는 곳에 두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태양의 전통'이다. 태양의 전통은 모두의 전통이다. 연구자들이나 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 힘은 인간이 지나는 길 위의 온갖 사소한 것들 속에 있다. 세상은 진실한 교실이다. 지고의 사랑이 당신이 살아 있음을 알고서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걸 가르칠 것이다." (p.42)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히피>는 동명의 주인공인 파울로가 두 차례의 히피 여행을 통해 삶의 지혜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친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1968년 여자 친구와 함께 잉카 문명의 유적지 마추픽추를 향해 배낭여행을 떠났던 파울로는 그의 첫 여행길에서 '세상은 진실한 교실'임을 깨닫지만, 돌아오던 길에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고초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2년여 후 그는 이제 단신으로 유럽 여행을 떠납니다. 유럽이 처음이었던 파울로는 우연히 들렀던 암스테르담에서 매력적인 여인 카를라를 만나게 됩니다. 네팔 카트만두로 갈 영혼의 동반자를 물색하고 있던 카를라는 브라질 청년 파울로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남자임을 직감하지만 자신의 속내를 숨긴 채 그의 곁으로 다가갑니다.
"사랑은 이 땅에서의 우리 사명과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을 깨닫게 해준다. 가슴에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선과 보호의 그림자가 뒤따르고, 그들은 힘든 순간에도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또한 빛을 담는 그릇이자 비옥함의 보고이자 길을 밝히는 등불인 사랑하는 이의 존재 외에는 그 어떤 조건이나 보상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내줄 것이다." (p.320)
최소한의 경비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파울로는 결국 카를라와 함께 카트만두행 '매직 버스'에 탑승하게 됩니다. 그들이 탄 '매직 버스'에는 다양한 탑승객이 타고 있었습니다. 평행현실을 탐구하는 아일랜드 청년 라이언과 그의 연인 미르트, 남아프리카 분쟁지역에서 환자들을 치유하다 성직자의 꿈을 꾸게 된 영국인 의사 마이클, 파울로의 트라우마를 보듬어주는 인도인 운전사 라훌, 자신의 성공을 유일한 삶의 가치라고 믿었던 자크가 몇몇 사건을 겪은 후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딸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 프랑스 부녀 자크와 마리 등. 자유로운 삶과 진리를 찾아 전 세계에서 모여든 이들은 긴긴 여행길에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외형상으로는 사실 무척이나 단순합니다. 70달러라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싼 가격으로 유럽에서 신비의 땅 네팔로 여행하게 될 '매직 버스' 탑승객들. 수학여행 버스처럼 낡고 불편한 버스였지만 그들은 동유럽과 터키를 거쳐 아시아로 향하는 긴 여정을 함께 합니다. 물론 미성년자였던 두 명의 소녀가 중간에 강제 하차를 하게 되지만 나머지 승객들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거나 서로를 격려하면서 여행을 계속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깨우쳐간다는 내용입니다.
"스스로를 믿는 사람은 타인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배신을 당하더라도 - 그런 때는 언제든 오기 마련이고, 그저 살다보면 겪게 되는 일일 뿐이다 -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건 그것이다." (p.116)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는 복잡하지 않은 스토리 라인에 매료되기보다는 간결하고 확실한 필치로 삶의 의미를 전달하는 작가의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스토리 라인은 그저 소설을 구성하는 하나의 형식 또는 사진 속 풍경이나 소설 속 배경처럼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의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말이지요. 예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도 비슷했던 듯합니다. 그 책에서도 수피즘의 큰 스승, 나스루틴의 강연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이 책에서도 수피즘이 등장합니다.
"나는 인생의 제자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요. 나는 마침내 가장 단순하고 예상치 못했던 것들, 예컨대 부모가 자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등을 통해 영혼을 살찌울 수 있었소. 따라서 수피즘의 지혜는 거의 대체로 성스러운 경전에 나와 있지 않다오. 그보다는 이야기나 기도나 춤이나 명상 속에 있지." (p.309)
요르단의 정치 불안으로 '매직 버스'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게 됩니다. 파울로는 그곳에서 춤추는 데르비시를 찾아 헤맵니다. 반면에 '자신의 힘이나 용기를 끊임없이 증명하며 자신의 한결같은 공격성과 통제 불가능한 경쟁심에 지쳐 있던' 카를라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실한 사람의 의미를 깨닫게도 되지요. 기쁨에 찬 그녀는 파울로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파울로는 이제 이튿날이면 자신이 마음을 열고 사랑에 빠지고 또 헤어진 수많은 연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태어난 나라에 가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실의에 빠진 순간에 용기 있는 척하는 방법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것들을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정말로 순환하는 공간을 돌고 있었다. 기쁨을 거두고 고통을 되돌려주었다가, 다시 고통을 거두고 기쁨을 되돌려주면서." (p.211)
일주일을 머물기로 했던 버스는 사흘 만에 다시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보다는 영혼의 발견에 더 관심이 많았던 파울로는 결국 '매직 버스'에 오르지 않습니다. '매직 버스'에 탑승한 카를라와는 헤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그들은 각자가 선택한 구도의 길을 따라 스스로의 길을 걷게 되는 셈입니다.
"태양에 절을 하시오. 태양이 영혼을 가득 채우도록 내버려두시오. 지식은 환영이고, 황홀경은 현실이지. 지식은 우리를 죄책감으로 채우지만, 황홀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과 파괴된 이후의 우주인 그분과 교감하게 해준다오. 지식을 추구하는 건 바로 옆에 깨끗한 우물을 두고서도 모래로 몸을 씻으려는 것과 같달까." (p.252)
우리는 어쩌면 인생이라는 '매직 버스'에 무임으로 승차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울로와 카를라가 그랬던 것처럼 각자가 선택하는 길도 다르고, 내려야 할 목적지도 다르지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그리고 신의 참뜻을 헤아리는 구도의 동행자들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각자가 선택한 방법이나 목적지는 다를지언정 목표는 하나인 셈이지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당신과 내가 서로를 격려하고 돕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경험을 그대에게 말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와 당신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