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민수 문지 푸른 문학
김혜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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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빅셀의 산문집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귀 기울여 듣기에는 관용이 필요하고 선입견이 없어야 하는데, 이른바 경험이라는 게 많아질수록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나를 성급히 이해하지 않은 탁월한 청중, 지적장애인들이 그때 이 사실을 기억나게 해 주었다.' 나는 누군가를 섣불리 예단하거나 아이들의 말을 건성건성 듣게 될 때마다 그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나는 그야말로 듣지 않아도 다 아는, 그래서 들을 필요가 없는, 그래서 스스로의 귀를 막아버리는, 나이도 많지 않은 '꼰대'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한없이 움츠러들게 되는 계절, 한 해가 저물어가는 어느 날 김혜정의 소설 <오늘의 민수>를 읽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두 명의 민수, 그들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함께 성장한다. 말하자면 성장소설이다. 예순두 살의 김민수와 열다섯 살의 주민수가 어떻게 서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지 책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 수 있다. 나이도, 직업도, 생김새도 극과 극으로 다른 그들이 한 권의 소설 속에서 동화처럼 펼쳐보이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세대 간의 소통이 절실한 작금의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니메이션 영화계의 거장 김민수 감독은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인 사람이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그러면서도 마음결이 투명한 매력적인 사람이다. 돈이 많고 명성이 자자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이가 든 지금도 아이의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있는 그런 인물이다. 반대로 중학생 김민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치가 빠르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며,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싹싹한 '애늙은이'다.

 

일본에 스튜디오를 둔 김 감독은 1년에 한 번 정도 누나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잠시 들르곤 했었는데, 이번엔 한 대학에서 특강을 맡게 되면서 예년과 달리 조금 오래 머물게 되었다. 그런 김 감독 앞에 또 다른 주인공 주민수가 나타난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맡게 된 엄마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살림을 도맡아 할 뿐만 아니라 엄마의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할 수 있는 착한 아들이다. 그런 민수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김 감독의 애니메이션을 다운로드하여 본 것으로 인해 저작권법 위반에 대한 벌금을 물어야 할 상황. 힘들게 일하시는 엄마를 봐서라도 고액의 벌금을 낸다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민수는 무작정 김 감독을 찾아가 사정을 하기에 이른다. 김 감독을 지근거리에서 돌보며 잡무를 처리하는 최 피디가 민수의 사정을 듣고 소송을 취하하는 대신 하나의 제안을 한다. 여름방학 동안 김 감독의 작업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돌봐달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예술가에게 걸맞은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지닌 김 감독은 대중 앞에 나서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자신의 차기 작품이 언론에 미리 노출되는 걸 무엇보다 싫어한다. 그러나 일에서만큼은 철두철미하다. 만화 그리기가 취미인 민수는 아내도, 자식도 없이 오직 애니메이션만 바라보며 평생을 살아온 김 감독을 흠모와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김 감독이 자신의 작업실 근처에 있는 카페의 주인인 여진을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민수는 김 감독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연애에 있어서는 젬병인 김 감독을 위해 여진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반면에 웹툰 작가가 되고 싶으면서도 안정된 직장을 바라는 엄마의 기대 때문에 고민하는 민수를 보면서 김 감독은 "노인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게 뭔 줄 아냐? 좀더 많은 모험을 해보지 못한 거라더라. 난 절대 후회하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 넌 안 그러니?" 하고 묻는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고 각자의 고민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우정을 키워간다.

 

두 사람의 우정이 순탄하게만 이어지는 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이 다 그런 것처럼 두 사람에게도 작은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 외치던 민수의 말버릇처럼 위기의 순간순간도 무사히 지나간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이유는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정서가 순하고 부드럽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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