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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ㅣ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8,90년대의 민주화 투쟁을 경험하지 못한 20대의 젊은이들에게 문익환은 어쩌면 낯선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문익환이라는 이름 석자는 통일과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각인되었다. 시를 노래하며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길만 고집스럽게 걷던 그가 쉰아홉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은 어쩌면 시대의 부름에 호응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를 시대의 외침에 호응하도록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성직자로서의 문익환이 보기에 남과 북의 우리 민족의 삶이 너무나도 애잔하다고 느꼈을 터였다.
아직 이런 말을 할 만큼 나이가 든 건 아니지만 한 사람의 삶에는 분명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문익환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1918년 만주 북간도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문익환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한인들이 세운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 북간도의 용정광명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의 문익환은 여리고 행복했던 듯 보인다.
"그 속에서 문익환은 겨울 동화를 살았다. 친구 윤동주,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아버지가 장로로 있는 주일학교를 다니며 성탄 때는 교회당 옆의 윤동주 집에서 새벽노래 준비를 하고 밤새워 꽃종이를 만들었다.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개가죽 버선을 신고 새벽 눈길을 걸어 다니며 찬송가를 부를 때는 하느님의 나라가 따로 없었다." (p.101)
순진하고 천진난만했던 그가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서 여섯 차례에 걸쳐 12년간의 옥살이를 감내할 만큼 강인한 투사의 길을 걷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열렬히 사모하던 여인 박용길과 결혼하여 만보산 골짜기에 터를 잡고 신접살림을 시작하자마자 태어난 첫 아이. 그 모습이 안쓰러워 신경 중앙교회 목사가 문익환을 부목사로 초빙하여 부부를 불러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의 앞날은 힘들지만 순탄한 듯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날아든 비보는 문익환의 삶을 현실 세계의 한가운데로 인도하기에 충분했다. 아끼던 친구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
"문익환은 자신이 구겨진 휴지처럼 역사의 구석지에 버려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확실히 문익환이 생각지 못한 제2의 길을 간 장준하와, 그보다 더한 제3의 길을 선택한 윤동주, 송몽규의 진로에 비추어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문익환은 엄청난 절망감에 빠졌다. 육체는 밥으로 살찌지만 정신은 기아와 고통으로 성장한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에 의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만 비로소 행동할 수 있게 된다." (p.178)
젊었을 때 종교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는 성직자나 신학자로서의 문익환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투사로서의 문익환이 더 익숙했다. 검은 뿔테 안경에 듬성듬성한 수염을 하고서도 얼굴에는 늘 미소를 잃지 않던 모습은 투사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1989년 3월 조평통의 초청으로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던 사건은 마치 어제의 일인 양 기억에 또렷하다. 군사정권의 엄혹했던 시기에 국가 기관 소속이 아닌 일반인의 신분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문익환이 법정에 섰을 때 두 손이 밧줄에 묶인 채 사진기자들에게 보여주었던 소년 같은 미소는 그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흉악범처럼 묶여 있는 처지와 미묘한 부조화를 이루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물론 그의 표정과 눈에는 통일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빛나고 있었지만 재판은 구역질이 날 만큼 유치한 여론몰이에 활용되었다." (p.606)
성직자라는 가면을 쓰고 정권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는 자들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목회자라는 지위와 권력, 신앙심을 이용해 여성신도에게 차마 못할 짓을 저지르거나 신도들의 헌금을 개인의 사적 치부 수단으로 활용하여 부를 쌓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겉으로는 목회자입네 우리 사회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는 아이러니한 현실 앞에서 문익환 목사는 얼마나 한결같았던가.
"그는 자신의 마음을 글자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쓰고자 했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숱한 존재들의 발자국이 덮어버리면 점점 지층 밑으로 사라져갈 것이었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못 돌아다니게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문익환이 지상의 사람들에게 남긴 선물이었다. 그가 예수의 말 중에서도 가장 경외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 문익환! 그의 민중 사랑은 이렇게 넓고 컸다. 넓고 컸던 사랑도 떠난 뒤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헌신적 인간애와 지사적 풍모에 거듭 감복했던 사람들도 그가 말하는 민족의 위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드러날 때까지 알지 못했다." (p.646)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문익환 목사와 같은 선각자가 있었기에 평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지 않나 싶다. 평화주의자가 곧 빨갱이로 매도되던 시기에 지속적으로 평화를 주장하던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지낸다. 나이가 들수록 한 인간이 걷게 되는 항거할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한다는 걸 믿게 되는 것처럼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는 날 그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한결같이 달려왔던 수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날 우리는 문익환이라는 이름 석자를 제일 먼저 호명할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