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원으로 퍼지는 물동그라미의 잔상처럼 주마다 반복되는 같은 무늬의 흔적들을 세월의 너른 도화지에 거듭거듭 찍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숙제 검사를 하는 담임 선생님의 한 손에 들려 있던 '참 잘했어요' 스탬프를 주말마다 의미도 없이 꾹꾹 눌러 찍는 듯한 기분이다. 이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세월을 흘려보내다 보면 내게 주어진 한 권의 세월 노트는 그렇게 찍힌 의미도 없는 스탬프로 금세 채워질 것만 같다. 다 써버린 세월 노트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동안 꽂혀 있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사는 게 다 그런 거라지만 날씨가 더워서인지 오늘따라 왠지 허무한 느낌만 가득 밀려온다.

 

오늘처럼 밑도 끝도 없는 허무가 밀려드는 날이면 아주 오래 묵은 피로마저 되살아난다. 손끝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무력감. 한 번 잠에 빠져들면 사나흘 깨지 않고 잠만 잘 것 같은 허물어짐이 어깨를 짓누른다. 연차를 받아 집에서 쉬고 있다는 친구는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한가한 전화를 했다. 응, 응 대답만 겨우 하는 내가 이상했던지 어디 아픈 것 아니냐며 뒤늦은 안부를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저 하루 이틀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전화 고맙다고, 나의 대답은 겨우 그 선에서 멈춘다. 하루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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