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 - 100개의 물질로 읽는 생명과 우주, 인류의 미래 최소한의 지식 2
김성수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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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스스로 공대생이라 생각하며 살진 않았지만, 컴퓨터 전공자였으니 공대생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이 말하듯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다"라는 문장을 마주하면, 나는 과학적 원리보다 먼저 시적 아름다움에 마음이 기운다.

그 아름다움은 결국, 우리가 세상의 시작을 어떤 이야기로 믿고 있느냐와도 맞닿아 있다.


세상의 시작에 대해 어떤 서사를 믿느냐에 따라 우리가 보는 세계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누군가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종교적 서사에서, 누군가는 정교한 수학적 질서에서 우주를 읽어낸다. 그럼 화학자는? "태초에 빅뱅이 있었고, 그 에너지가 원자를 빚어냈다"는 물질의 서사로 세상을 본다. 이 책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원시 우주의 수소 원자부터 첨단 탄소나노튜브까지, 보이지 않는 원자들이 어떻게 나와 지구를 만들었는지 그 장대한 계보를 펼쳐 보인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은 별에서 온 원소들이 어떻게 암석과 바다가 되었는지, 인류가 그 물질들을 어떻게 요리해서 지금의 문명을 일궈냈는지를 서사적으로 추적한다. 식량 위기를 해결한 암모니아부터 내 손안의 스마트폰 반도체, 수명을 늘려준 의약품, 그리고 오존층 파괴 문제를 해결한 몬트리올 의정서까지. 화학은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을 뿐 아니라, 인류의 어제를 만들고 내일을 결정짓는 역동적인 학문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요즘 어쩔 수 없이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추출 과정에 대한 이런저런 부정적인 정보 때문에 늘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었다. 그런데 책을 통해 다이클로로메테인(CH₂Cl₂)의 정체를 알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됐다. 카페인만 콕 집어 녹여내는 이 용매는 끓는점이 매우 낮아 원두를 볶는 과정에서 완전히 증발해 버린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막연한 공포를 명확한 과학적 사실로 씻어내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화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아닐까.


저자 김성수는 100가지 물질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일이 "나침반 없이 남극 설원에 홀로 놓인 것 같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우주-지구-생명-문명-미래를 잇는 빅히스토리를 완성해냈다. 물리학이 다루는 우주의 기원은 원자의 탄생으로, 생물학의 생명 현상은 효소의 대사로, 역사학이 다루는 문명은 합성물의 기술로 재해석되며, 화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을 연결하는 '중심 과학'임을 보여준다.


솔직히 100가지 이야기를 하나하나 온전히 이해하기는 벅찼다. 하지만 저자가 펼쳐놓은 물질의 서사 속에서 '나'라는 존재의 기원을 발견하는 즐거움만큼은 확실했다. 세상 어느 것도 무(無)에서 저절로 생겨나지 않으며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다.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지 않나? AI 시대에도 결국 물질의 본질을 이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책을 덮고서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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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평등에 미친 시대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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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도서를 읽고 기록한 솔직한 서평입니다.


몇 년 전, 전국의 거리는 '검은 롱패딩 군단'이 점령했다. 지하철역에서도, 학교 앞에서도 똑같은 길이와 색깔의 옷을 입은 이들이 유령처럼 몰려다녔다. 아이들의 요청에 지갑을 열었던 부모들은 '두고 봐라, 몇 년 뒤면 분명 숏패딩이 유행할 거다'라며 예언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 예언은 적중했다. 유행이라는 이름의 획일성은 매년 옷의 길이를 줄였다 늘였다 하며 인간의 취향을 길들이고 있다.


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묘하다. 유일무이한 존재로 남들과 다르길 열망하면서도, 정작 소속되지 못할 때의 불안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지우고 무채색의 집단 속으로 기꺼이 녹아드는 모순을 선택한다.


『마니아, 평등에 미친 시대』는 그런 인간의 모순적 본능이 '지성'이라는 영역과 만났을 때 벌어지는 비극을 블랙 코미디처럼 보여준다. 소설 속 세상에서 '롱패딩'은 옷이 아니라 '지능의 평등'이라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똑똑하다"라는 이 획일적인 교리는 차별을 없애겠다는 선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 개인의 고유한 탁월함을 '혐오'라는 이름으로 단죄하기 시작한다.


'바보', '멍청이', '천재' 같은 단어는 금기어가 되며, 이를 사용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처벌받는 사회가 된다. 언뜻 생각하면 도덕적으로 나쁠 것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지능에 따른 구분이 사라지자 무능력한 사람들이 전문가가 되기도 하고 세상이 점차 우스꽝스럽고 위험하게 변해간다.


소설은 40년 우정 관계인 피어슨과 에머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사회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피어슨은 사실을 말할 자유를 지키려다 고립되는 인물이고, 에머리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영민하게 자신을 세탁하며 성공을 쟁취하는 인물이다.


현실 속에서 우리도 두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롱패딩 군단에 속하는 사람과, 그 획일화된 행렬에서 이탈해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사람 말이다. 어떤 관점이 옳다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다. 나 또한 학창 시절 친구들과 유행을 따라 하며 그 동질감이 주는 특유의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혼자 튀는 것보다 무리 속에 섞여 있을 때 얻는 평온함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정감의 대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남들과 똑같아지기 위해 내 안의 고유한 차이들을 스스로 깎아내는 동안 인간의 자유는 그만큼 쪼그라든다. 어쩌면 중요한 건 어느 쪽이 옳으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나의 선택이 유행인지 신념인지 자각하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인스타를 열어보니 지금은 '두쫀쿠'가 유행인가 보다. 아직 먹어보지 못했는데 그 맛이 궁금하긴 하다. 나도 모르게 맛집을 검색하고 있는 걸 보니, 획일성이라는 롱패딩은 생각보다 벗기가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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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계절을 기억한다
양창순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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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마음의 날씨는 예측불가이다. 아침에는 설레는 봄이었다가 오후가 되면 갑자기 시린 겨울의 우울 속으로 침잠해버리곤 한다. 내 마음임에도 통제할 수 없고 제멋대로 날뛰는 변덕 앞에서 우리는 종종 무력해진다.


친구와의 수다, 카페에서의 독서, 시원한 맥주 한 잔. 우리에게는 마음의 소란을 잠재울 저마다의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런 처방은 일시적일 뿐이다. 돌아서 다시 가슴 한구석이 허기진다면, 이제는 내 마음의 상태를 보다 근본적으로 다스릴 '제철 레시피'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양창순 박사는 『마음은 계절을 기억한다』에서 무질서하게 요동치는 우리 마음을 사계절의 순리라는 틀 안으로 가져온다. 저자가 제시하는 28가지 마음가짐은 봄·여름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가을·겨울의 수렴하는 지혜로 나뉜다.


사실 "사계절이 있어 아름답다"는 말에 이제 동의하기 힘들다. 계절마다 바뀌는 기온에 몸을 적응시키고, 옷가지와 살림을 챙겨야 하는 현실적인 피로감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나라가 삶의 효율 면에서는 훨씬 나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의 영역만큼은 이 번거로운 순환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는 에너지가 흐르는 원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만약 1년 내내 뜨거운 여름만 계속된다면 땅은 사막이 되고 식물은 타 죽고 말 것이다. 우리 마음도 늘 열정적이고 바쁘기만 하면 결국 번아웃에 이른다. 에너지를 내뿜는 봄·여름이 있다면, 반드시 에너지를 비축하며 멈추고 비우는 가을·겨울의 시간이 순환의 고리 안에 있어야 한다.


결국 순환한다는 것은 지금 내게 찾아온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수용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불안이나 우울이 찾아오면 "이게 왜 안 없어지지?"라며 저항하지만, 그 감정을 밀어내려는 노력이 역설적으로 마음을 그 자리에 붙들어 매게 만든다. 감정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취급하며 붙들고 있는 사이, 마음의 계절은 흐름을 멈추고 답답한 응어리로 고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감정을 겨울이라고 인정하고 흘러가게 두라고 조언한다. 지금의 고통이 끝이 아니라 순환의 한 마디임을 믿는 것, 즉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는 자연의 법칙을 신뢰하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열쇠가 된다. (다만 겨울이 너무 길어지거나 혹독하다면, 그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마음을 돌보는 한 방법이다.)


이 책이 말하는 마음먹기란 내 마음의 날씨를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지금 지나는 계절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그에 맞는 양분을 섭취하는 일이다. 제멋대로 날뛰던 마음의 날씨가 자연스러운 순환의 마디를 회복할 때, 우리 안의 생명력은 정체된 시간을 지나 다시금 흐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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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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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헤르메스(Hermes)는 킬레네 산 동굴에서 태어난 바로 그날 스스로 강보를 풀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고 전해진다.


갓 태어난 헤르메스는 길을 걷다 우연히 이복형 아폴론(Apollo)이 돌보던 소 떼를 발견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그는 곧바로 아폴론의 소 쉰 마리를 훔치기로 마음먹는다. 소들의 행방이 드러나지 않도록 발굽에 나뭇가지를 대어 거꾸로 걷게 만들고, 자신의 발에도 나뭇잎을 묶어 흔적을 감춘다. 소 떼를 멀리 떨어진 동굴에 숨긴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요람으로 돌아가 얌전히 누워 있었다.


소 떼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아폴론은 흔적을 좇아 헤르메스의 동굴까지 찾아온다. "소를 훔쳐 간 것이 너 아니냐"는 물음에 헤르메스는 "나는 소를 몰고 간 적이 없다"고 태연히 맹세한다. 소들을 거꾸로 걷게 했으니 '몰고 간 것'이 아니라는 교묘한 논리다. 말 그대로 궤변이다. 이 일화는 헤르메스가 속임수와 기지, 교활한 언변의 신이라는 어두운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헤르메스에게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신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의 말을 신들에게 전하는 '전령의 신'이기도 하다. 신들(특히 제우스)의 모호하고 은유적인 메시지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통역하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였다.


벌써 12•3 사태의 1주기가 지났다. 지난 일 년은 각성과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정치를 공익이 아닌 사욕으로 이용한 자를 탄핵하면 나머지 문제들은 자연히 풀리리라 믿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명백한 내란의 정황과 증언들이 차곡차곡 드러나는데도 내란의 수괴는 여전히 괴변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길을 걷는 듯 보이는 사법부를 지켜보는 시간은 답답했다. 법의 언어가 진실을 밝히기보다 은폐하는 데 쓰인다면, 해석의 힘은 공동체를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위험한 무기가 된다.


"해석은 힘이다."

해석학자 폴 리쾨르의 말이다. 리쾨르는 해석이 단순히 의미를 밝히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틀을 설정하고 사건을 규정하는 권력이라고 보았다. 무엇이 '사실'이냐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해석의 기술은 그래서 너무 쉽게 은폐의 기술, 왜곡의 기술이 된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가 목격한 일들은 바로 이 해석의 권력이 어떻게 폭력으로 변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었다.


고명섭의 『카이로스 극장』은 이러한 해석과 권력이라는 문제의식을 한국 정치의 최근 역사 위에 펼쳐놓는 책이다. 저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신화, 그리고 동서양의 인문학적 텍스트를 소환해 지난 3년 반의 정치적 혼란을 해석한다. 플라톤이 경고한 무능한 조타수,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욕망 없는 지성으로서의 법', 헤르메스의 양면적 해석 권력은 모두 한국 사회가 경험한 사건들과 기묘하게 맞닿아 있다.


저자는 이처럼 고전적인 통찰과 현실 정치의 문제를 엮어내며, 우리가 지나온 3년 반의 시간을 수천 년 인류 정치사를 토대로 다시 바라본다.


그리스어에서 시간은 두 단어로 나뉜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가리키는 연속적이고 양적인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변화가 가능해지는 질적이고 결정적인 시간이다. 12•3 사태는 그 카이로스가 우리에게 닥쳐온 사건이었다.


카이로스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공동체가 새로운 눈을 뜨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다시 묻게 되는 결단의 순간이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는 법과 언어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권력이 어떻게 해석을 통해 현실을 다시 쓰려 하는지 똑똑히 목격했다. 결국 카이로스란 진실을 숨기려는 해석의 폭력과 맞서는 시간이며, 공동체가 다시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이다. 『카이로스 극장』은 바로 이 결단의 무대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버릴지, 어떤 해석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선택할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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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 융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인생 수업
최광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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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마흔쯤 되자 내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나는 중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마흔 이후로는 변화가 선택이 아닌 필수이자 생존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


내 삶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 마흔이 막 지나던 그때였다. 아이를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주말은 세 식구 세 끼를 챙기느라 해가 져야 여유가 생겼다. 그런 나에게 변화라니?


어찌 보면 안정적일 수 있는 삶이었지만, 나는 꼬리에 못이 박힌 도마뱀처럼 붙박이가 되어버렸다. 마음은 달랐다.


돌이켜보면 20~30대에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분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인정받고, 성취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그 시절 삶의 중심은 언제나 바깥에 있었다.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고, 사회적 역할을 다하며, 페르소나를 완벽하게 작동시키는 일이 곧 나 자신이라고 믿고 살았다.


40대가 되고 난 후, 알 수 없는 불안이 피어올랐다. 예전에 나를 감싸주던 페르소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삶의 무게는 있는 그대로 나를 짓눌렀다. 몸도 예전 같지 않았고, 감정의 파고도 심했다. 주변 사람과 관계를 풀어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 본 대학에서 가족상담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심리학자 최광현은 그의 책에서 40대의 이런 상태를 '고통'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가 말한 고통에는 희망이 숨겨져 있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젊은 시절이 아니라 중년에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자신의 삶이 어떤 위기도 없이 완벽하다면 자기실현의 과제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고통'을 겪고 있다면, 나로 살기 위한 여정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젊을 때는 무의식의 요소들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삶이 굴러갔다. 욕망도, 두려움도, 슬픔도 한쪽에 밀어두고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중년이 되면 이 방식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솟구쳐 오르고, 호르몬의 변화가 찾아오며, 책임의 무게는 더해진다.


『나로 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바로 이 시기에 닥쳐오는 질문과 심리적 혼란이 왜 찾아오는지를 융의 심리학을 통해 차분히 들려준다.


1장에서는 내 안에 숨어 있던 '다른 나'가 중년에 이르러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다룬다. 융이 말한 '그림자',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 그리고 내면의 반대 성적 인격인 '아니마·아니무스' 개념을 통해, 중년이 마주하게 되는 내적 균열과 자기 이해의 과정을 차근히 짚어낸다.


2장에서는 일상과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대극의 원리를 설명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할 때 어떻게 적대감이나 열등감이 생겨나는지 살피고, 관계는 고정되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통찰을 제시한다.


3장에서는 융의 '집단 무의식'을 꿈, 환상, 신화적 상징을 통해 쉽게 풀어낸다. 똥꿈·개꿈 같은 일상의 이미지와 신화 속 상징들이 무의식의 원형을 드러내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삶의 방향 전환을 암시하는 '힌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꿈에서 등장하는 상징이 왜 개인의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가 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4장에서는 삶의 흐름이 반대 방향으로 전환되는 '에난티오드로미아'를 통해 중년의 마지막 과제가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힘'임을 강조한다. 경쟁·성과 중심의 삶에 치우쳤다면 이제 협동·이타성·여유 같은 반대편 가치를 끌어안아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나는 내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은 많은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다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융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융이 말하듯, 어리석음조차 결국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과거는 더 이상 현재를 가로막는 짐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태도는 세계를 “옳음·그름”, “성공·실패”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시선과 연결된다.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일 수도 있다”라는 관점, 다시 말해 상반된 요소를 함께 견디고 품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융이 말한 성숙의 징표이며, 자아가 전체성에 이르는 과정이다.


융의 고백을 읽고 신기했다.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잦아들기 시작한 순간들이 그의 말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밀려 쓴 내 삶을 매듭짓는 시간들은 길고 외로웠지만 그 순간들이 변화의 시작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다.

무엇보다 “이것이면서 저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은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내가 붙들고 싶은 한 문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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