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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불완전함에 대하여
팀 하포드 지음, 윤영삼 옮김 / 윌마 / 2026년 5월
평점 :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일 중 하나는 과일 깎기다. 어느 날 사과 껍질을 끊기지 않게, 두께까지 맞춰가며 깎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손에 땀이 배어 나고 있었다. 완벽주의 성향 탓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자각하는 순간, 내 자신이 약간 변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사과는 그냥 껍질째 먹는다.
먼저 제목이 주는 안도감이 있다. 효율이 미덕이 된 이 시대에, 불완전함이라는 단어는 낯설고도 반갑다. 살면서 불완전함이 결함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말을, 나는 언제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팀 하포드는 이 책에서 우리 시대가 신뢰하는 가치들, 체계, 효율, 계획의 치밀함이 실은 인간의 본성과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따져 묻는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혼돈 속에서 길을 찾고, 실패를 통해 배우고, 즉흥적인 순간에 창의성을 발휘한다. 불완전함은 극복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인간다움 그 자체다. 완벽함은 기계의 언어에 가깝다. 기계조차 오류를 일으키는 시대에.
저자는 완벽하게 설계된 시스템이 멈추는 순간 드러나는 인간의 즉흥성과 회복탄력성을 다양한 사례로 풀어낸다. 그 중 두 장면이 오래 남는다. 1975년 쾰른 오페라하우스,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은 제대로 조율조차 되지 않은 낡고 망가진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공연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피아노의 한계 안에서 연주했다.
"일어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며, 신음하고 몸부림치며, 피아노를 망치로 내려치듯이 두들기며 혼신의 힘을 쏟은 결과, 결코 들어본 적 없는 명연주가 탄생했다.(…) 눈앞에 펼쳐진 혼돈을 회피하지 않고 맞선 그는 그것을 뚫고 날아올랐다."
그날 밤의 즉흥 연주는 재즈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솔로 피아노 앨범이 되었다.
또 하나는 빌딩 20이다. 2차 세계대전 중 MIT에 급조된 임시 건물로, 전쟁이 끝나면 철거될 예정이었다. 복도에는 배관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필요하면 언제든 끌어다 새로 연결해 쓸 수 있었다. 건축가나 관리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공간이었다.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와 아홉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그 허술한 건물에서 나왔다. 두 사례가 말하는 것은 같다. 완벽하지 않은 조건이 오히려 인간을 깨웠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며 요즘 읽고 있는 <계몽의 변증법>이 자꾸 겹쳐왔다. 인간이 효율과 체계화를 그토록 지향하게 된 것, 그 뿌리에 계몽이라는 사상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몽은 인간을 미신과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기획이었다. 자연을 지배하고, 세계를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인간을 합리적 주체로 세우려 했다.
그 기획은 대체로 성공했다. 자연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고, 세상은 숫자와 계산으로 읽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 인간마저 기계의 부품처럼 숫자로 환원되었고,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였다는 감각을 잃었다. 계몽과 함께 시작된 효율성, 합리화는 인간이 가진 본성을 자연스럽게 혐오하고 멀리하게 만들었다.
AI의 등장으로 이제는 기계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을 느끼는 이 시대에, 기계처럼 더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답일까. 팀 하포드는 그 반대편을 가리킨다. 기계가 할 수 없는 것, 혼돈 속에서 즉흥적으로 반응하고, 실패를 딛고 다시 방향을 찾는 것. 그것이 오히려 인간만이 가진 힘이라고.
몇 해 전 도시를 떠나 전원으로 왔다. 정원을 가꾸며 산다. 모종을 심고 기다리는 일, 제 멋대로 자라나는 초화류와 나무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계절을 견디는 일. 처음엔 그 통제할 수 없음이 낯설고 불안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정원도 삶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계획보다 조금 더 크다. 그리고 그 어긋남 속에서 오히려 뭔가가 자란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나는 흙과 자연을 곁에 두며 조금씩 배우고 있다.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딱딱함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춤출 수 있는 감각이다. "이 세상을 움직인 건 언제나 모호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이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사과 껍질은 삐뚤 빼뚤 잘라도 된다. 정원은 계획대로 자라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