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
허나영 지음 / 비에이블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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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왜 시와 음악, 그림에 끌리는 걸까. 쓸모와 필요로 가득 찬 세상의 경계 너머를 보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예술이 내어주는 여백은 우리를 현실의 중력 밖으로 데려간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 밖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


작년 한 해, 미술관을 찾는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빡빡한 일상 속에 자신만의 숨구멍을 내려는 갈망이 만들어낸 풍경일 테다. 허나영의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바로 그 갈망에 응답하는 책이다.


대개의 미술 책들이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라는 지식의 지도를 건넨다면, 이 책은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지식보다는 공감을, 설명보다는 위로를 택한 저자의 문장 덕분에 그림은 한결 가깝고 개인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저자는 모호한 감정을 ‘날씨’라는 언어로 치환한다. 불안은 안개 낀 아침으로, 우울은 바람 부는 날로, 슬픔은 폭풍우로 그려내는 식이다. 마음의 기상도에 따라 작품을 배치하고, 화가들이 창작의 순간 겪었던 내면의 흔들림에 주목한다


여기에 작가 자신이 불안과 우울의 터널을 통과하며 겪어낸 회복의 과정을 한 편의 에세이처럼 진솔하게 엮어냈다. 


책 속에 소개된 수많은 작품 중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이 두 점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와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옆으로 누운 어머니와 아이 II>였다. 아르테미시아에게선 고통을 뚫고 나가려는 치열한 생존의 의지를 보았고, 파울라에게선 현실과 이상을 모두 그러모아 쥐려는 예술가의 단단한 생명력을 느꼈다.


사람의 마음이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고, 보기 싫은 얼룩은 숨기고 싶기 마련이다. 삶이라는 캔버스 위에서 빛이 닿는 장면만 드러내고, 길게 드리워진 그늘은 영영 가려두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말한다. 삶은 결코 햇빛 쨍한 날로만 채워질 수 없다고.


빛나는 부분만 있었다면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그토록 신비한 울림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짙은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우리는 살아내야 하고, 또 살아가야만 한다.


돌이켜보면 외면하고 싶었던 못난 나의 모습조차 내 삶을 구성하는 거칠고 투박한 질감이었다. 비바람에 휘청이던 서툰 감정도, 눅눅했던 마음의 날씨도 이제는 지울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무늬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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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을 위한 철학 - 나를 짓누르는 삶의 중력을 거슬러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
시몬 베유 지음, 한소희 엮음 / 구텐베르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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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산책길에서 꺾여 있는 소나무 가지 하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가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도 전에, '리스 소재로 쓰면 딱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세상을 만날 때 그것의 본래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기보다, 자신의 욕망과 필요라는 프리즘을 통해 먼저 계산하고 해석한다.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의 확신은 근대적 주체라는 거대한 신화를 만들어 냈다. 그 신화 속에서 세상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세계의 주인공 자리에 앉아, 모든 존재를 자신의 목적에 맞는 '도구'로 재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구화는 비단 사물에만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인간이 인간을 사물처럼, 시스템의 부품처럼 다루며 타자의 고유한 존재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주체가 과잉된 세계에서 타자도 세계도 더 이상 존엄한 무엇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채워주거나 방해가 되는 사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더 쓸모 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 스펙을 쌓고, 끊임없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갈고닦는다. 주체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서려는 그 노력이, 어느 순간 스스로를 상품화된 객체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 걸까.


시몬 베유는 이 비극적인 역설 앞에서 사유가 아닌 몸을 던져 넣었다. 촉망받는 철학자였던 그녀가 1934년 르노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것은, 타자의 고통을 책상 위에서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자신의 안락함을 부끄러워한 결단이었다.


“끔찍한 것은, 당신이 하는 일이 시계의 초침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100분의 1초 단위로 쪼개진 시간의 노예가 된다. 기계는 당신의 주인이 되고, 당신은 그저 기계의 변덕에 복종할 뿐이다.” 시몬 베유가 『노동 일기』에 남긴 이 처절한 기록은 주체가 완전히 파괴된 현장의 증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을 위한 철학』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반전을 꾀한다. 주체가 해체되는 이 극한의 상황을 단순한 몰락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내 욕망과 의지로 세상을 주무르던 주체의 환상이 깨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실재와 진실하게 만날 기회를 얻는다. 자아라는 두꺼운 벽이 사라진 빈자리에야 비로소 타자의 진실과 사물의 본래 모습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환상과 누군가의 도구로 전락한 현실 사이에서, 우리의 삶은 자꾸만 어긋난다.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했던 ‘나’는 세상에 나가자마자 그 냉험한 사실을 몸소 겪는다. 어찌할 수 없는 그 앞에 삶이 무력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그녀의 철학은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부터 세상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말한다. 나의 욕망을 비워내고 대상을 소유하려 들지 않는 고요한 응시, 베유는 그것을 '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유는 자아를 비워 우주의 근원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불교의 무아(無我)나 인도의 고대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나를 증명하려는 안간힘을 내려놓고 자신을 텅 비워낼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재단하는 ‘주인’이 아닌, 세계와 진실하게 공명하는 ‘존재’가 된다.


책장을 덮고 다시 산책을 나선다. 겨우내 축적한 뱃살을 빼기 위함도 아니고, 필요한 소재를 찾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천천히 내딛는 땅을 밟고 하늘을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소나무를 스쳐 온 바람을 만난다. 비로소 세상이 그 자체로 내게 다가옴을 느낀다.


사실 하이데거와 니체, 사르트르의 철학에 익숙한 내게 자아를 비워내라는 그녀의 사상은 아직 다 알 수 없는 신비에 가깝다. 주체의 의지와 기투를 강조하는 사유들 틈에서,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돌리는 베유의 언어들은 때로 낯설고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무언가 되어야 하고,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았기 때문일까. 그녀를 통해 세상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그저 가만히 응시해야 할 실재로 마주하는 또 다른 시선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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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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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누군가에겐 탈출하고 싶은 지옥이었을 높은 담장 안이, 소년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보금자리였다. 환자 수 1,500명이 넘는 주립 어린이·청소년 정신병원. 그 거대한 격리 구역의 정중앙에 한 가족이 산다. 병원장 가족을 위한 관사가 하필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요아힘 마이어호프의 자전 소설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는 이 기묘하고도 서늘한 동거에서 시작된다.


제목만 보면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일 것 같지만, 책장을 넘기자마자 마주하는 건 천진난만하고 유쾌한 세계다. 주인공 요아힘에게 쇠창살은 감옥이 아니라 조금 다른 이웃들의 창문이었고, 밤마다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익숙한 자장가였다. 폐쇄된 공간에 살면서도 요아힘은 누구보다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소년의 눈에 비친 어른들은 환자든 아니든 그리 다르지 않다. 자기만의 루틴에 집착하는 환자 페르디난트나 한여름에도 털옷을 고집하는 영어 선생님, 불쑥 전쟁 트라우마를 쏟아내는 교장 선생님은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산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요아힘은 그들을 편견의 눈으로 평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우리 곁의 이웃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특별한 환경 속에서도 요아힘의 가족은 평범하게 흘러가는 듯 보인다. 지적이고 다정한 아버지, 헌신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어머니. 소설의 3분의 2 정도는 니콜라의 소동처럼 매일이 유쾌한 장면으로 채워진다. 소년에게 닥친 시련이라곤 고작 형들의 짓궂은 놀림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에 접어들면, 유쾌한 소동극의 막이 걷히고 외면하고 싶었던 가족의 민낯이 드러난다. 부모라는 이름 아래 부부라는 관계는 위태로웠다. 병원의 지배자인 아버지는 평생 외도로 아내를 외로움과 히스테리에 몰아넣었다. 결국 부모는 헤어지고, 아버지는 새 연인을 따라 떠난다. 형의 죽음과 아버지의 임종을 거치며 요아힘은 비로소 이 모든 혼돈을 직시한다.


"그래, 이제 나는 믿는다. 내가 기억의 보따리를 다시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때, 그리고 나의 죽은 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 친숙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인정한 것보다 더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과거를 단순히 아름답게 꾸미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적 치유에 가까운 '기억의 주권 찾기'다. 삶에서 고통이나 상처를 가리고 외면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봉합이나 미화는 결국 회피나 자기기만에 가깝다. 상처를 미화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상처는 나의 주인이 되어 내 삶을 은밀히 조종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꿰매지 않고 응시하는 법.


요아힘은 그 구멍을 억지로 메우는 대신, 그 구멍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바꾼다. 시선을 바꾼다는 것은 아버지의 외도를 '가족을 향한 배신'으로만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를 완벽해야 할 '부모'라는 틀에서 해방시켜, 욕망과 고독에 흔들리던 한 명의 '낯선 타인'으로 인정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이 소설의 진짜 미덕이 드러난다. 요아힘은 "다 이해하니까 용서한다"는 식의 상투적이고 도덕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를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감 자체를 느끼지 않는다. 어린 시절 그의 세계 속 인물들이 '아버지', '어머니', '형'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과 관념으로 묶인 사람들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고정된 무엇이 아닌,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낯선 타자들이다.


이처럼 이름 너머에 숨겨진 그들의 다양한 면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곧 요아힘이 과거라는 중력에서 벗어나 가능성이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글쓰기를 통해 기억의 주권을 되찾은 소년은 이제 더 이상 과거에 갇혀 있지 않다.


이 책의 제목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는 중의적인 선언이다. 그것은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늘로 돌아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내 기억의 감옥에 억눌려 있던 그들을 비로소 나의 관념 밖으로 기꺼이 '날려 보낸다'는 작가의 결단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그리고 형을 내가 만든 편협한 정의에서 해방시킬 때, 그들은 비로소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들을 놓아준 소년의 삶 역시, 비로소 중력을 이기고 가볍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죽은 이는 날아오르고, 산 자는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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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어떻게 변화를 거부하는가 - 인류가 나아지지 못하는 7가지 이유와 그럼에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
슈테판 클라인 지음, 유영미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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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 헬스장에는 '기부천사'들의 명단이 확정되고 호기롭게 주문한 영어 교재에는 라면 국물 자국만 훈장처럼 남을 시기다. 구차하게 변명해 보자면 이제 내 이야기는 아니다. 목표를 이루고 있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노라 답하겠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책 한 권을 폈다 덮는 소소한 행위, 그것이 나의 유일하고도 작은 계획이다.


물론 십 년 된 이 습관도 거저 얻은 건 아니다. 처음엔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핸드폰으로 돌아가는 눈을 '딱 1페이지만 더'라는 주문으로 붙잡아야 했다. 『뇌는 어떻게 변화를 거부하는가』를 읽으며 비로소 그때의 고군분투가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이해했다.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내 뇌가 변화라는 ‘침입자’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 슈테판 클라인에 따르면, 우리 뇌는 에너지를 극도로 아끼려는 ‘가성비 중독자’다. 뇌 입장에서 새로운 변화는 에너지를 퍼부어야 하는 ‘고위험 투자’다. 10년 전 내가 책을 펴려 할 때마다 뇌는 "이건 에너지 낭비야! 그냥 하던 대로 핸드폰이나 봐!"라며 나를 유혹했던 것이다.


작가는 서두에서 몬트세랫의 화산 폭발 이야기를 꺼낸다. 마을이 섭씨 600도의 용암에 뒤덮이는데도, 구조된 주민들은 기어이 살던 집으로 되돌아갔다가 결국 숨진 채 발견됐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슈테판 클라인은 묻는다. 우리의 모습은 그들과 정말 다른가? 운동이 좋은 걸 알면서도 소파와 한 몸이 되고, 술과 담배가 수명을 갉아먹음을 알면서도 잔을 채운다. 뇌는 '옳은 길'보다 '익숙한 길'을 편안해하기에,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 역시 각자의 화산을 품고 사는 몬트세랫 주민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다이어트에 실패했다고 자책하며 닭다리를 뜯던 손을 탓할 필요는 없겠다. 내 손과 입은 잘못이 없다. 그저 뇌가 ‘현상 유지’라는 가성비 경영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니까. 뇌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보다 이미 머릿속에 짜놓은 각본대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예측부호화(Predictive Coding)’ 본능이 있다. 저자는 외계인 추종자들의 사례나 코카콜라의 브랜드 이미지 등을 통해 우리를 기만하는 인지적 오류들을 해부한다. 결국 변화가 어려운 이유는 의지의 결핍이 아니라, 인지부조화와 확증편향 같은 ‘이성의 함정’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생 이 고집불통 뇌의 노예로 살아야 할까? 작가는 ‘넛징(Nudging)’과 ‘시스템’이라는 희망의 밧줄을 던져준다. 그리스 신화 속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의지력을 믿는 대신, 부하들의 귀를 막고 자신을 돛대에 밧줄로 꽁꽁 묶게 했다. 노래가 들려오자 그는 줄을 풀라고 울부짖었지만, 미리 설계해둔 시스템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10년 전 내가 꾸역꾸역 책 앞에 앉았던 시간들도 사실 나를 독서라는 돛대에 묶어둔 ‘방구석 오디세우스’적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 책은 단순히 '성공하는 법'이 아니라, 우리가 왜 이토록 변하기 힘든 존재인지에 대한 통찰을 전한다. 변화는 내 뇌와의 싸움이 아니라, 뇌의 본성을 이해하고 활용하며 함께 걸어가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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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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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저의 솔직한 생각을 담아 썼습니다.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화면을 응시한다. 전원을 켜고 클릭 몇 번만 하면 멸종한 공룡의 포효부터 아득한 우주 속 판타지까지 눈앞에 펼쳐진다. 그렇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보는 것'에 할애한다. TV를 보고, 넷플릭스를 보고, 아이폰 속 끊임없이 흐르는 숏츠를 본다. 우리를 유혹하는 영상 앞에서 우리는 그저 수동적인 구경꾼이다.


그러나 책은 어떤가? 사각형의 종이 낱장으로 엮인 책은 앞선 유혹자들에 비해 수수하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이 정적인 물건은 언뜻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상황은 반전된다. 영상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보여줄 뿐'이지만, 책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베르베르의 『나는 그대의 책이다』는 대놓고 노골적으로 말을 걸어온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이 책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속삭인다.


“저는 한 권의 책이며 그것도 살아 있는 책입니다. 제 이름은 〈여행의 책〉입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는 가장 가뿐하고 은근하고 간편한 여행으로 당신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뭐랄까요…… 어떤 강렬한 것을 함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순간, 작가와 독자 사이에 흐르던 오랜 암묵적 규칙은 깨진다. 작가는 뒤로 물러나고, 내 손에 들린 종이 뭉치가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며 여행을 떠나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영상 매체가 우리를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가둬두었다면, 이 책은 독자를 ‘그대’라고 부르며 능동적인 모험으로 초대한다.


어쩔 도리 없이 상상 속의 나는 책의 목소리와 함께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 위를 날아간다. 가져본 적도 없는 날개로 바람결을 느끼고 창공을 가른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책은 나를 이끌고 공기, 흙, 불, 물이라는 4원소의 세계로 인도한다. 공기의 세계에서 영혼의 자유로운 비상을 만끽하다가도, 흙의 세계에 들어서면 대지 위에 나만의 안식처를 짓는 평온을 경험한다. 때로는 불의 세계에서 내 안의 적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물의 세계에 침잠하며 생명과 우주의 탄생을 목격한다.


이 여행의 목적지는 외부의 우주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대 자신'이다. 책은 말한다. "좋은 책이란 그대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넷플릭스가 스펙터클한 허상을 보게 한다면, 이 책은 활자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 물음은 나의 내면을 넘어,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거대한 계보로 나를 이끈다. 나라는 한 사람의 생명이 만들어지기 위해 존재했던 나의 부모, 조부모,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먼 선조들을 하나하나 조우하게 한다. 그렇게 다다른 종착역은 우주 빅뱅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말한다. 우리는 세상에 그저 ‘우연히 던져진 존재’라고. 그들의 철학을 처음 접했을 때, 내 존재의 뿌리가 필연이 아닌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꽤나 서늘했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이 낯선 세계에 툭 떨어졌다는 ‘피투성(被投性)’의 자각은 나를 채울 길 없는 허무와 허탈함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론 그들의 철학이 그 허무에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베르베르가 안내하는 우주적 관점에 서는 순간, 이야기는 다르게 쓰여지기 시작한다.


빅뱅과 함께 탄생한 수소 원자들은 수십억 년의 시간을 건너 별의 내부로 모여들었다. 별은 거대한 용광로가 되어 가벼운 수소들을 짓눌러 탄소, 질소, 산소 같은 생명의 원소들을 빚어냈다. 결국 내 몸을 구성하고 피를 돌게 하는 모든 것은 먼 옛날 별의 심장에서 구워져 튕겨 나온 '별의 파편'들이다.


나는 결코 세상에 툭 떨어진 이방인이 아니다. 거대한 우주적 사건들이 억겁의 세월 동안 한 번의 끊김도 없이 이어져 온 끝에 비로소 탄생한 존재다. 나뿐만이 아니다. 너와 우리, 그리고 이 땅에서 숨 쉬는 모든 생명이 이 경이로운 우주적 서사의 주인공들이다.


이 책과 여행 끝에 만난 나의 계보는 이것이다. 나는 단순히 구경꾼이 아닌 별들의 시작과 함께 생겨난 거대한 드라마의 살아 있는 결과물이라는 것. 수수한 종이 뭉치가 건넨 이 노골적인 유혹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별의 기억을 깨웠다.


“독자여, 그대는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세계와 우주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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