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잘하고 있다고, 심리학이 말했다 -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탐색하는 자존감 수업
슈테파니 슈탈 지음, 김시형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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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때는 자존심과 자존감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막연히 내 자존감이 높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회사 생활이 그 착각을 깨줬다. 친절하게도. 내가 믿어온 자존감은 사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존심에 불과했음을. 그리고 생각보다 나의 자존감은 훨씬 더 취약했다는 사실을.


슈테파니 슈탈은 거의 모든 심리적 문제의 뿌리에 자존감 결핍이 있다고 단언한다. 불안, 공포, 강박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자존감은 이 모든 현상을 결정짓는 마음의 '근본 축'이다. 축이 휘어지면 삶의 모든 궤적이 어긋나듯, 자존감을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그 어떤 심리적 방어기제도 우리를 온전히 지켜줄 수 없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약점을 포함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느냐의 여부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부족함을 감추려 애쓰지 않는다. 약점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에 타인의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불안이라는 왜곡된 안경을 쓴 채 세상을 바라본다. 이 대목에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니 늘 불안이 앞서고, 그 불안을 메우고자 다시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열심히 해내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열심히 산다'고 믿었던 모습 뒤에, 사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처절한 분투가 숨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아프게 직면하게 된다.


저자는 내면아이, 내적 통제신념, 나르시시즘 등 심리학적 개념으로 우리 마음의 지도를 그려낸다. 그 분석의 끝은 결국 자기수용이라는 목적지에 닿아 있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불안해하는 자신을 다시 자책하는 일이다. 저자는 이제 자신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불안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유년기의 절망적인 경험이 남긴 흔적일 뿐이다. "난 왜 이 모양일까" 채찍질하는 대신, "그래, 내가 지금 이렇구나" 친한 친구를 대하듯 자신을 다정하게 품어주어야 한다고.


다만 거의 모든 심리적 문제의 뿌리가 자존감 결핍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인간의 심리는 때로 생물학적 요인이나 환경적 제약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사회 구조가 주는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자존감은 내 마음의 불필요한 소음을 끄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데 가장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 "당신은 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는 저자의 말이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나를 향한 다정함이 쌓일 때, 삶은 그때서야 내 편이 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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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기, 소유되기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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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찹받아 읽고 작성한 주관적 리뷰입니다.


올해 우리 집에 상전이 한 분 생겼다. 무려 ‘고3 수험생’이다. 내내 방문을 닫고 있으니 정확히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코피 터지게 열공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아이의 눈밑엔 벌써 다크서클이 훈장처럼 내려앉았다. 나의 눈빛은 의심과 불안 속에 흔들린다.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진로 상담지를 앞에 두고 내뱉은 한마디는 꽤 낭만적이었다. “엄마, 나 작가 해볼까?”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선 ‘자본주의적 회계 시스템’이 자동으로 가동됐다. 작가라는 근사한 단어 뒤로 낮은 등단 확률과 빠듯한 인세 같은 현실적인 계산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이다. 결국 고민 끝에 에둘러 내뱉은 말은 이랬다. “음... 진로 두 개는 마련해야겠는데?”


이런 나의 '회계적 본능'은 저자 율라 비스가 페인트 한 통을 고르며 하는 고민과 꼭 닮아 있었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는 가격의 페인트 브랜드를 발견한 참이다. 물론 사려면 살 수도 있다.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페인트 같은 물건을 어떻게든 구입한다는 것은 보통 경제적 능력이 아니라 가치를 선언하는 일이다."


비싼 페인트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선언하려는 그녀의 욕망이나, 아이의 꿈에 안정성이라는 안전장치를 달아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길 바라는 나의 염려나, 결국 그 뿌리는 같았다. 이 책 《소유하기, 소유되기》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동시에 사회에서 더 잘 팔리는 가치 있어 보이는 '상품'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사실 말이다. 페인트 한 통으로 자신의 품격을 증명하려는 저자나, 아이의 꿈조차 '유용함'으로 계산해버리는 나나, 결국 자본주의라는 거대 시스템에 무의식까지 저당 잡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자크 라캉은 우리의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현대인의 무의식은 이미 자본주의라는 문법으로 빼곡하게 짜여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의 낭만적인 고백 앞에서 ‘작가’라는 행위 대신 ‘인세’라는 숫자를 먼저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내 무의식의 언어가 효율과 유용이라는 문법에 깊이 길들여졌다는 서글픈 증거였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이것이었다.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그녀에게, 건축학을 전공하고 운전대를 잡은 택시기사가 묻는다. 저자가 교수라는 사실을 알고 던진 질문이었다. 


“학생들에게 그 일로는 생활비를 벌 수 없는 일을 가르쳐서 먹고사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세요?”


한마디로 당장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학문을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 기사의 이 질문은 내 머릿속 ‘회계 시스템’을 정면으로 타격했다. 아이에게 작가라는 꿈 대신 ‘진로 두 개’를 운운했던 나의 논리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질문에 피하지 않고 이렇게 답한다.


“제가 학생들에게 해주는 일은 사람들이 대체로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에서 가치를 찾는 방법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타인에게 뭔가 가치 없는 일을 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는 건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저자가 말하는 이 선물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용함’일 것이다. 효율과 유용함의 세계에서 무용함을 쫓아 살아도 좋다고 그녀는 나직이 말한다. 하지만 율라 비스는 자신의 목소리에 실린 무게가 어디서 오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녀가 가르치는 '글쓰기'가 당장 시장에서 수익을 보장하지 않음에도, 이를 설파할 수 있는 이유가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위신이 높은 엘리트 대학의 교수라는 직함 덕분임을 정직하게 응시한다.


아이의 첫 번째 꿈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나에게는 자꾸만 갑갑한 마음이 든다. 마음 같아서는 이상은 더 높은 곳을, 시선은 이 너머의 가치 있는 것들을 향해 살라고 호기롭게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현실의 중력은 그리 가볍지 않다.


결국 《소유하기, 소유되기》는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무엇으로 계급을 가르는가, 우리는 왜 일하는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이 책은 무용함과 유용함 그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좋은 삶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아이의 방문 앞에서, 나는 비로소 내 머릿속 회계 시스템의 전원을 잠시 꺼보기로 했다. 현실의 중력이 무거워 아이의 첫 번째 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엔 여전히 망설임과 회의적인 마음이 앞선다.


아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꿈이 많이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책을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전공이 무엇이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작가'라는 명사를 소유하라고 말하는 대신, 그저 글을 쓰는 즐거운 행위 그 자체를 응원해 주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소유하기보다 존재하기를.

유일무이한 너로, 그저 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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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
허나영 지음 / 비에이블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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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왜 시와 음악, 그림에 끌리는 걸까. 쓸모와 필요로 가득 찬 세상의 경계 너머를 보게 하기 때문은 아닐까. 예술이 내어주는 여백은 우리를 현실의 중력 밖으로 데려간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 밖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


작년 한 해, 미술관을 찾는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빡빡한 일상 속에 자신만의 숨구멍을 내려는 갈망이 만들어낸 풍경일 테다. 허나영의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바로 그 갈망에 응답하는 책이다.


대개의 미술 책들이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라는 지식의 지도를 건넨다면, 이 책은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지식보다는 공감을, 설명보다는 위로를 택한 저자의 문장 덕분에 그림은 한결 가깝고 개인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저자는 모호한 감정을 ‘날씨’라는 언어로 치환한다. 불안은 안개 낀 아침으로, 우울은 바람 부는 날로, 슬픔은 폭풍우로 그려내는 식이다. 마음의 기상도에 따라 작품을 배치하고, 화가들이 창작의 순간 겪었던 내면의 흔들림에 주목한다


여기에 작가 자신이 불안과 우울의 터널을 통과하며 겪어낸 회복의 과정을 한 편의 에세이처럼 진솔하게 엮어냈다. 


책 속에 소개된 수많은 작품 중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이 두 점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와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옆으로 누운 어머니와 아이 II>였다. 아르테미시아에게선 고통을 뚫고 나가려는 치열한 생존의 의지를 보았고, 파울라에게선 현실과 이상을 모두 그러모아 쥐려는 예술가의 단단한 생명력을 느꼈다.


사람의 마음이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고, 보기 싫은 얼룩은 숨기고 싶기 마련이다. 삶이라는 캔버스 위에서 빛이 닿는 장면만 드러내고, 길게 드리워진 그늘은 영영 가려두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말한다. 삶은 결코 햇빛 쨍한 날로만 채워질 수 없다고.


빛나는 부분만 있었다면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그토록 신비한 울림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짙은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우리는 살아내야 하고, 또 살아가야만 한다.


돌이켜보면 외면하고 싶었던 못난 나의 모습조차 내 삶을 구성하는 거칠고 투박한 질감이었다. 비바람에 휘청이던 서툰 감정도, 눅눅했던 마음의 날씨도 이제는 지울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무늬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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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을 위한 철학 - 나를 짓누르는 삶의 중력을 거슬러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
시몬 베유 지음, 한소희 엮음 / 구텐베르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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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산책길에서 꺾여 있는 소나무 가지 하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가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도 전에, '리스 소재로 쓰면 딱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세상을 만날 때 그것의 본래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기보다, 자신의 욕망과 필요라는 프리즘을 통해 먼저 계산하고 해석한다.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의 확신은 근대적 주체라는 거대한 신화를 만들어 냈다. 그 신화 속에서 세상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세계의 주인공 자리에 앉아, 모든 존재를 자신의 목적에 맞는 '도구'로 재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구화는 비단 사물에만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인간이 인간을 사물처럼, 시스템의 부품처럼 다루며 타자의 고유한 존재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주체가 과잉된 세계에서 타자도 세계도 더 이상 존엄한 무엇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채워주거나 방해가 되는 사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더 쓸모 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 스펙을 쌓고, 끊임없이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갈고닦는다. 주체라는 이름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서려는 그 노력이, 어느 순간 스스로를 상품화된 객체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 걸까.


시몬 베유는 이 비극적인 역설 앞에서 사유가 아닌 몸을 던져 넣었다. 촉망받는 철학자였던 그녀가 1934년 르노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것은, 타자의 고통을 책상 위에서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자신의 안락함을 부끄러워한 결단이었다.


“끔찍한 것은, 당신이 하는 일이 시계의 초침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100분의 1초 단위로 쪼개진 시간의 노예가 된다. 기계는 당신의 주인이 되고, 당신은 그저 기계의 변덕에 복종할 뿐이다.” 시몬 베유가 『노동 일기』에 남긴 이 처절한 기록은 주체가 완전히 파괴된 현장의 증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을 위한 철학』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반전을 꾀한다. 주체가 해체되는 이 극한의 상황을 단순한 몰락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내 욕망과 의지로 세상을 주무르던 주체의 환상이 깨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실재와 진실하게 만날 기회를 얻는다. 자아라는 두꺼운 벽이 사라진 빈자리에야 비로소 타자의 진실과 사물의 본래 모습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환상과 누군가의 도구로 전락한 현실 사이에서, 우리의 삶은 자꾸만 어긋난다.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했던 ‘나’는 세상에 나가자마자 그 냉험한 사실을 몸소 겪는다. 어찌할 수 없는 그 앞에 삶이 무력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그녀의 철학은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부터 세상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말한다. 나의 욕망을 비워내고 대상을 소유하려 들지 않는 고요한 응시, 베유는 그것을 '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유는 자아를 비워 우주의 근원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불교의 무아(無我)나 인도의 고대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나를 증명하려는 안간힘을 내려놓고 자신을 텅 비워낼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재단하는 ‘주인’이 아닌, 세계와 진실하게 공명하는 ‘존재’가 된다.


책장을 덮고 다시 산책을 나선다. 겨우내 축적한 뱃살을 빼기 위함도 아니고, 필요한 소재를 찾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천천히 내딛는 땅을 밟고 하늘을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소나무를 스쳐 온 바람을 만난다. 비로소 세상이 그 자체로 내게 다가옴을 느낀다.


사실 하이데거와 니체, 사르트르의 철학에 익숙한 내게 자아를 비워내라는 그녀의 사상은 아직 다 알 수 없는 신비에 가깝다. 주체의 의지와 기투를 강조하는 사유들 틈에서,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돌리는 베유의 언어들은 때로 낯설고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무언가 되어야 하고,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았기 때문일까. 그녀를 통해 세상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닌, 그저 가만히 응시해야 할 실재로 마주하는 또 다른 시선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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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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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누군가에겐 탈출하고 싶은 지옥이었을 높은 담장 안이, 소년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보금자리였다. 환자 수 1,500명이 넘는 주립 어린이·청소년 정신병원. 그 거대한 격리 구역의 정중앙에 한 가족이 산다. 병원장 가족을 위한 관사가 하필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요아힘 마이어호프의 자전 소설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는 이 기묘하고도 서늘한 동거에서 시작된다.


제목만 보면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일 것 같지만, 책장을 넘기자마자 마주하는 건 천진난만하고 유쾌한 세계다. 주인공 요아힘에게 쇠창살은 감옥이 아니라 조금 다른 이웃들의 창문이었고, 밤마다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익숙한 자장가였다. 폐쇄된 공간에 살면서도 요아힘은 누구보다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소년의 눈에 비친 어른들은 환자든 아니든 그리 다르지 않다. 자기만의 루틴에 집착하는 환자 페르디난트나 한여름에도 털옷을 고집하는 영어 선생님, 불쑥 전쟁 트라우마를 쏟아내는 교장 선생님은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산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요아힘은 그들을 편견의 눈으로 평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우리 곁의 이웃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특별한 환경 속에서도 요아힘의 가족은 평범하게 흘러가는 듯 보인다. 지적이고 다정한 아버지, 헌신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어머니. 소설의 3분의 2 정도는 니콜라의 소동처럼 매일이 유쾌한 장면으로 채워진다. 소년에게 닥친 시련이라곤 고작 형들의 짓궂은 놀림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에 접어들면, 유쾌한 소동극의 막이 걷히고 외면하고 싶었던 가족의 민낯이 드러난다. 부모라는 이름 아래 부부라는 관계는 위태로웠다. 병원의 지배자인 아버지는 평생 외도로 아내를 외로움과 히스테리에 몰아넣었다. 결국 부모는 헤어지고, 아버지는 새 연인을 따라 떠난다. 형의 죽음과 아버지의 임종을 거치며 요아힘은 비로소 이 모든 혼돈을 직시한다.


"그래, 이제 나는 믿는다. 내가 기억의 보따리를 다시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때, 그리고 나의 죽은 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 친숙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인정한 것보다 더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과거를 단순히 아름답게 꾸미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적 치유에 가까운 '기억의 주권 찾기'다. 삶에서 고통이나 상처를 가리고 외면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봉합이나 미화는 결국 회피나 자기기만에 가깝다. 상처를 미화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상처는 나의 주인이 되어 내 삶을 은밀히 조종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꿰매지 않고 응시하는 법.


요아힘은 그 구멍을 억지로 메우는 대신, 그 구멍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바꾼다. 시선을 바꾼다는 것은 아버지의 외도를 '가족을 향한 배신'으로만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를 완벽해야 할 '부모'라는 틀에서 해방시켜, 욕망과 고독에 흔들리던 한 명의 '낯선 타인'으로 인정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이 소설의 진짜 미덕이 드러난다. 요아힘은 "다 이해하니까 용서한다"는 식의 상투적이고 도덕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를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감 자체를 느끼지 않는다. 어린 시절 그의 세계 속 인물들이 '아버지', '어머니', '형'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과 관념으로 묶인 사람들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고정된 무엇이 아닌,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 낯선 타자들이다.


이처럼 이름 너머에 숨겨진 그들의 다양한 면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곧 요아힘이 과거라는 중력에서 벗어나 가능성이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글쓰기를 통해 기억의 주권을 되찾은 소년은 이제 더 이상 과거에 갇혀 있지 않다.


이 책의 제목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는 중의적인 선언이다. 그것은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늘로 돌아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내 기억의 감옥에 억눌려 있던 그들을 비로소 나의 관념 밖으로 기꺼이 '날려 보낸다'는 작가의 결단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그리고 형을 내가 만든 편협한 정의에서 해방시킬 때, 그들은 비로소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그리고 그들을 놓아준 소년의 삶 역시, 비로소 중력을 이기고 가볍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죽은 이는 날아오르고, 산 자는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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