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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 여행자-되기 ㅣ 둘이서 3
백가경.황유지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8월
평점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유타주 피쉬레이크 국유림에는 신비로운 나무숲이 있다. 판도(Pando)라 불리는 이곳에는 43헥타르에 걸쳐 4만여 그루의 아스펜나무가 자란다. 언뜻 보면 제각각인 나무들 같지만, 사실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단일 생명체다.
이 숲은 들뢰즈가 말한 ‘리좀(rhizome)’의 살아 있는 모델과도 같다. 위아래의 질서 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어느 지점에서든 새로 움트며, 한쪽이 잘려도 다른 곳에서 다시 돋아난다. 중심도 끝도 없는 이 자유로운 연결의 구조가 바로 리좀의 형상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경쟁 속에서 길러지며, 누군가를 이겨야만 더 높이 설 수 있다고 배운다. 물론 친구와 철봉에서 오래 매달리기를 하거나 자전거로 속도를 다투는 일은 즐거운 경쟁을 통해 서로의 한계를 넓히고 성장하게 한다. 그러나 공부로 시작되는 입시전쟁과 취업전쟁은 어린 시절의 ‘우리’를 ‘나’라는 고립된 주체로 바꿔 놓는다. 공동체적 연대는 희미해지고, 개인의 생존만이 우선시되는 생존 모드로 바뀐다.
하지만 아스펜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듯, 우리는 결코 외따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수고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며, 우리의 삶은 보이지 않는 맥락 속에서 서로 이어져 있다.
『관내 여행자-되기』에서 두 작가는 ‘관’이라는 키워드로 공간과 사람, 기억과 현재를 잇는다. 그렇게 ‘관’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길이 된다.
인천의 성냥공장 여공들,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 의정부 뺏벌의 성매매 여성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 이들이 찾아간 곳곳에는 사회가 외면하거나 망각하려 했던 이름들이 있다.
불편하다거나 연민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이들, 혹은 빨리 잊으라 재촉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꺼내진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건넨다.
두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각각의 공간은 개별적인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이며, 서로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천 성냥공장의 어린 여공들이 겪었던 열악한 노동 환경은 오늘날의 비정규직 문제와 성별 임금 격차로 이어진다. 의정부 뺏벌의 성매매 여성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경제적 취약성에 내몰린 여성들의 현실 속에서 되풀이된다. 사회는 여전히 그 책임을 개인의 선택으로 돌리거나, 그들의 존재를 가려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구조적 문제를 감추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는 더욱 직접적으로 현재와 가깝다. “정부 부처, 서울시, 용산구, 경찰 관계자, 해밀톤의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황유지의 기록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무책임이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드러낸다.
다행히 이번 정부 들어 대통령과 정부가 유가족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매우 늦었지만, 동시에 감동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사과와 성찰이 첫걸음이 될 수 있으나, 그 진정성과 책임의 이행은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관내 여행자-되기』가 보여주는 것은 고립된 ‘나’의 서사가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는 ‘우리’의 이야기다. 아스펜나무의 뿌리가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얽혀 있듯, 우리의 삶 또한 보이지 않는 연대 속에서 지탱된다. 그것은 들뢰즈가 말한 리좀처럼, 끊어낼 수 없는 연결망 속에서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 연결의 감각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경쟁과 고립의 논리 속에서 ‘나’만을 지키려는 태도를 넘어, 타자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서는 일. 그 마음에서부터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고, 아픔을 포용하는 힘 또한 길러지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