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
이지윤 지음 / 쌤앤파커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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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미술관에서 가끔 생각한다. '아, 저 그림은 갖고 싶다.' 사본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작품이 곧 상품이라는 말이 나에겐 낯설다. 누군가에게는 재테크이고 세테크라는데.


<세상에 순수한 미술은 없다>는 그 낯섦을 다룬다. 작품과 작가가 아니라, 미술 생태계 쪽에서 본 주문서의 역사다.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조토의 걸작이라 불리는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주문한 사람은 엔리코 스크로베니, 그의 아버지는 파도바에서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였다. 고리대금업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들 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 예배당을 짓는 일이 유행했다. 미술사가 걸작이라 부르는 그림은 천국을 돈으로 사려 한 집안의 주문서에서 시작됐다.


사연을 알고 나면 그림이 달라 보인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는 귀족의 침실을 장식하던 그림이었다. 침대 헤드보드 높이에 맞춘 장식화, '스팔리에라'다. 렘브란트가 평생 남긴 마흔 점 넘는 자화상은 내면의 기록인 동시에 공방을 찾아온 손님 앞에 펼쳐 보이는 포트폴리오였다. 18세기 베네치아를 그린 카날레토의 풍경화는 그랜드 투어를 다녀온 귀족들이 사간 고급 기념품이기도 했다.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며 마주 서는 그 자리는, 원래 그 그림의 자리가 아니었다.


렘브란트의 노년 자화상이 떠오른다. 작품으로만 바라보았을 때 느꼈던 감동이 살짝 희석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든든한 후원자가 있지 않은 한 예술가도 밥벌이를 해야 한다. 이해는 된다.


책은 그림 뒤의 시장으로 옮겨 간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 뒤 그림값이 올랐다. 화가들도 죽어 경쟁자가 줄었고, 살아남은 소수에게 부가 몰렸고, 죽음을 코앞에서 본 사람들이 자기를 기억해줄 그림을 주문했다. 공급은 줄고 수요는 늘었다. 그렇게 미술이 상품 쪽으로 한 걸음 옮겨 간다.


700년 뒤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2020년 소더비가 연 온라인 경매 250여 건에서 낙찰자의 30퍼센트 이상이 처음 온 사람이었다. 40세 이하도 30퍼센트를 넘었다. 갤러리 문턱을 넘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화면으로 그림을 샀다. 역병이 돌면 누군가는 그림을 산다.


죽음을 가까이서 본 사람은 자기보다 오래 남을 무언가를 갖고 싶어진다. 미술관에서 내가 중얼거리는 '갖고 싶다'와 같은 말이지만 무게가 다를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어떤 감각인지는 알 것도 같다. 나에게 일주일이 남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갖고 싶은 그림 한 점 구매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 이제 한 가지 생각이 더 날 듯도 하다. 저 그림은 누구의 주문서에서 시작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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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뮤지엄 - 디자인으로 읽는 인간 욕망의 역사
김신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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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나에게 디자인은 '예쁜 것'이다. <디자인 뮤지엄>은 그 '아름다움'이 결과이지 이유가 아님을 보여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기능적인 불편함보다 미학적인 부분에 점수를 더 주는 편이긴 하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예쁜 것에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것은.


책의 구성이 인상적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살다', '다루다', '기록하다', '보다'라는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네 개의 '전시실'로 짜여 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관람하는 기분이 든다.


읽는 내내 부제에 눈이 갔다. '디자인으로 읽는 인간 욕망의 역사'.

인간의 욕망과 디자인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책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간과 사물의 변천사가 나온다. 부엌, 욕실, 조명, 의자 등등. 초창기의 디자인은 투박하고 기능이 전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더 편리하고 좀 더 아름답게 변해 간다.


앉을 수 있으면 의자로서의 기능은 다하는 셈이다. 그러나 인류는 수천 가지 디자인의 의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필요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잉여다. 디자인은 거기서 자란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기에 일어난 디자인의 혁신적인 변화를 '모더니즘'이라고 일컬어요. 우리말로 하면 '현대성'이라고 할 수 있죠.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가치는 보편성입니다. 모더니즘 이전의 모든 예술 사조, 문화적 변화는 권력을 위한 것이었어요."


과거에 디자인은 소수 권력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누구나 마음에 드는 조명이나 의자 하나쯤 자기 방에 들일 수 있다. 저자는 이를 디자인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부록으로 실린 '일상의 풍경을 바꾼 디자인 운동'이었다. 이 부록은 '모더니즘'이 만들어진 배경을 다룬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공장에서 찍어 낸 물건들은 조악했다. 윌리엄 모리스는 일상의 물건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돈을 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욕망이었다. 그러나 장인들의 손으로 만든 물건은 비쌌고, 결국 그의 바람과 달리 부유층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라기보다 시작이었다. 1919년 독일에서 문을 연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기술이 하나여야 한다고 보았다. 모리스가 등을 돌린 기계를 그들은 끌어안았다. 형태를 단순하게 만들면 기계로 찍어 낼 수 있고, 그러면 값이 내려간다. 마르셀 브로이어가 강철 파이프를 구부려 만든 의자가 그 증거였다. 아름다움이 목적이 아니라 대량생산이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의자와 조명이 백 년이 지난 지금 예쁘다는 이유로 팔린다.


서평을 쓰면서 막힐 때 인테리어 쇼핑몰 창을 연다. 예쁜 화병과 거기에 꽂힌 꽃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인간이 필요만 채우고 산다면 이것들은 모두 아무 쓸모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영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은 아름다운 것, 더 나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소박한 한 끼를 굳이 예쁜 그릇에 담는 마음, 그것도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욕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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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질문에 답하는 짧은 철학책 - 인간관계부터 커리어까지, 생각이 많은 나를 위한 철학 수업
크리스토프 크바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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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철학은 다르게 생각할 용기를 주는 활동이다'라는 출판사의 홍보 문구에 공감한다. 일상은 평범하게 흐르다가도 예기치 못한 일에 흔들린다. 그런 삶과 철학이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 학문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진짜 물음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반갑다.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해도 괜찮을까?", "내가 하는 일을 꼭 사랑해야 할까?" 같은 질문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본 것들이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내 삶의 장면에서 시작하니, 철학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중 키르케고르와 니체를 다룬 대목이 좋았다. 키르케고르에게 '나'는 완성되는 상태가 아니라 끝나지 않는 과정이며, 다 되었다고 믿는 순간 나를 잃는다. 니체가 위버멘시라 부른 창조하는 인간도 그렇다. 창조는 낡은 것을 허무는 일이라 늘 위험하지만, 니체는 그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를 넘어서는 자를 사랑했다. 그 넘어섬이 곧 살아 있다는 것이다. 두 철학은 모두, 고정되지 않고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나'를 향한다. 완성이 곧 상실이라는 말이, 무언가를 자꾸 끝맺고 확인하려는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이 책은 일상의 질문마다 '예' 혹은 '아니오'로 먼저 답을 내놓는다. 정답이 없어 보이는 물음 앞에서 누군가 "이게 맞다"고 방향을 제시해 주면 편리하다. 다만 편리함은 언제나 무언가를 생략한 대가로 온다. 답은 대체로 저자 자신의 의견이 먼저 있고, 철학자는 그 뒤에 소환된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와 상황에 불려 나온 철학자의 사상이, 애초에 그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어긋나는 지점이 눈에 띄었다.


가령 헤겔의 변증법이 그렇다. 저자는 그것을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도 타협하라"로 읽는다. 그러나 그의 유명한 주인노예 변증법에 타협은 없다. 그것은 목숨을 건 투쟁에서 시작된다.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기대어 산다. 반면 노예는 주인에게 예속된 듯 보이지만, 노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 예속된 쪽은 오히려 주인이다. 변증법은 양보와 절충이 아니라 대립을 끝까지 밀어붙여 전복시키는 힘이다. 그것을 타협으로 옮기는 순간, 헤겔의 핵심은 사라진다.


레비나스를 가져온 챕터도 비슷하다.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게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을 노숙인에게 건네는 연민의 적선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그 적선이 우리의 인간성을 위한 일이라고 말한다. 좋은 의도의 말이고 행동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무한이며, 나로 환원되지 않는, 신성에 가까운 부름이다. 나는 그 앞에서 무한히 응답하도록 소환될 뿐, 그를 결코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타자를 동정의 대상으로 좁히고, 무한한 부름을 '나의 인간성'을 위한 수단으로 되돌린다. 나를 높은 곳에서 부르던 얼굴이, 내가 내려다보며 돕는 자리로 끌어내려지는 것이다. 타자를 결코 나를 위한 도구로 쓸 수 없다고 한 철학자가, 정작 나를 위해 타자를 돕는 자리에 세워진다.


일상의 질문에 답하고자 철학자들의 언어를 가져오는 설정은 흥미롭고 유용하다. 하지만 빌려온 언어가 원래의 뜻과 어긋날 때, 그 유용함은 오해가 되기도 한다. 철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철학이 삶의 물음에 답할 때조차, 그 답은 세계를 보는 틀에서 따라 나온다. 틀을 떼어내고 결론만 옮기는 순간, 그것은 처세의 요령이 되고 만다. 철학을 삶에 붙인다는 것은 당장의 답 대신 삶의 방향과 의미를 묻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물음을 닫지 않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유용하지 않다. 그리고 유용하지 않기에 철학이다. 그러니 이 책은 정답을 찾는 이에게는 유용하고, 철학을 더 깊이 알고 싶은 이에게는 시작점 정도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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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책
후안 비요로 지음, 보탬 옮김 / 열림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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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후안은 성 한가운데 있다. 통로 끝에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는 무장한 군인이다. 그녀를 구하러 간다. 다다른 곳은 진홍빛 방. 벽에 손을 댄다. 피가 흐른다. 아이는 꿈에서 깬다.


수백만 권의 책이 꽂혀 있는 서가. 내 기억 속에도 그런 서가가 있다. 지금은 문을 닫고 없는 반포의 반디앤루니스. 후안이 느낀 무력함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오던 그 무렵, 나 역시 그랬다. 고속터미널 꽃시장을 지날 때면 손끝으로 꽃을 스치고, 그 길로 서점에 들어섰다. 부드럽고 은은한 조명, 갈색 책장마다 높이 꽂혀 있던 책들. 층층의 계단에 앉아 마음껏 읽고 구경할 수 있던 그곳은 나의 은신처였다.


그 공간을 가득 메우던 책 냄새, 그곳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주인공 후안이 '야생의 책'을 찾아 모험을 떠나듯, 나도 나의 질문들의 답을 찾아 매일 그곳으로 향했다.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처음 집어 든 책은 '에티카'였다. 스피노자의 그 수많은 명제들. 그것은 알 수 없는 암호 같았고, 한 자 한 자 해독하는 것은 어둠 속을 더듬으며 길을 찾아가는 일과 같았다. 이해하고 싶은데, 읽고 싶은데 알 수 없는 그 문장들은 손에 땀이 나게 했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 한 시간 정도를 들이고 나면 남는 건 허무와 무력감이었다. 신기한 것은, 후안이 '야생의 책'을 찾아 몇 주간 모험을 떠나듯, 나 역시 매일 책장을 펼칠 때 알 수 없는 설렘이 있었다는 것이다.


후안은 부모의 별거와 이사 문제로 방학 동안 삼촌 집에 맡겨진다. 그곳에는 수백만 권의 책이 꽂힌 도서관이 있다. 띠또 삼촌은 후안에게 '야생의 책'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것을 찾아주기를 바란다.


"그 책이 그분들에게서 도망쳐 버렸대. 반항아 같은 책이지. 길들일 수 있는 누군가에게만 읽을 수 있게 허락할 거래. 기수에게 길들여지는 야생마처럼 말이야."


나도 그 책을 길들이고 싶었다.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으니까. '아, 이 책은 이거였어!' 하고 닫아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 속에 지식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었다. 당시에 느끼는 결핍을, 책에서조차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붙들었음에도 그 결핍은 채워지지 않았다. 다만 모험을 떠난 후안처럼, 나에게 길들이기를 거부하는 책을 찾아 헤매던 그 시간들은 남아 있다. 일 년에 걸쳐 세 번을 읽었지만, 몇몇 챕터는 끝내 열지 못했다. 책이 거울처럼 나를 들여다보는 그 시간 속에서, 나도 나를 바라보았다.


책 속에 이런 문장이 있다.

" '야생의 책'은 현재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지극히 희귀한 존재이지. 아직 읽은 사람이 없잖아. 그리고 이제 곧 짠 하고 나타날 책이거든. 그 책이 독자를 찾으면 내용을 스스로 쓸 거라고. '야생의 책'에 필요한 게 바로 이런 독자야. 현재를 살고, 오래전에 일어난 일들을 현재의 시점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해 진정한 독자."


십 년 전 그 서점에서 조급했던 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때 길들이지 못한 '에티카'가 지금 이 책을 통해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 같다. 다른 점은 그때보다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는 것. 그리고 그 책 말고도 여러 권의 철학서를 그렇게 만나기를 수없이 반복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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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여행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50
로런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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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


18세기 유럽 상류층에서 그랜드 투어가 유행이었다. 있는 집 자제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을 몇 달, 길게는 몇 년씩 돌았다. 로마의 유적을 보고 피렌체의 미술을 감상하고 주류 사회의 인맥을 쌓았다. 돌아와 "거기 다녀왔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자랑거리였다. 여행기가 명소와 견문 중심이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랜드 투어에서 볼테르와 달랑베르를 만났고, 특히 파리에서 경제학자들과 나눈 교류가 〈국부론〉으로 이어졌다. 괴테는 1786년 이탈리아에서 고전 예술을 직접 보고 〈이탈리아 기행〉을 남겼다. 몽테스키외는 유럽을 수년간 돌며 정치 제도를 관찰해 〈법의 정신〉을 썼다. 모두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다. 보고 배우고, 돌아와 무언가를 이루는 여행.


제목은 〈감성 여행〉인데 로런스 스턴의 소설은 그 계보에서 벗어나 있다. 다 읽고 남는 것은 주인공 요릭이 만난 사람들, 소소한 사건들, 그가 느낀 감정과 약간의 유머가 전부다. 처음엔 당황했다. 이렇다 할 사건도 서사도 없으니. 그러다 한 가지가 걸렸다. 스턴은 이 책을 "구원의 작품"이라 불렀다. 평생 폐결핵을 앓았고, 피를 토하는 고통과 가난과 불행한 결혼 속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 쓴 책이다. 출간 한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죽어가는 사람이 어째서 이 가벼운 책을 구원이라 불렀을까.


"프랑스에 가 보신 적 있나요?" 하인의 한마디에 요릭은 즉흥적으로 프랑스행을 결심한다. 여권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동냥하는 수도승에게 모욕을 주고, 처음 만난 여인의 부탁을 들어주고, 길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에게 자꾸 이끌린다. 목적지도, 이뤄야 할 것도 없다.


스턴은 요릭의 입을 빌려 이렇게 쓴다.

“모든 것에 온 마음을 담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에겐 이 짧은 인생의 마디마다 얼마나 풍성한 모험거리가 기다리고 있는가. (…) 정직하고 공정하게 손길을 건네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이라면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을 것이다.”


손길을 건네 붙잡는다. 이 한 문장이 소설 전체의 열쇠다.

요릭은 길에서 만나는 여성들의 손을 자꾸 잡는다. 말보다 먼저, 이성보다 먼저 손이 닿는다. 18세기 신사라면 해선 안 될 행동이다. 낯선 여성의 손을 잡는 건 예의에 어긋났으니까. 그러나 요릭의 몸은 그걸 알면서도 먼저 움직인다. 스턴이 프랑스에서 디드로를 만났다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성보다 몸의 감각을 앞세웠던 그 유물론자와,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요릭은 닮았다. 몸이 닿는 순간 타자와 연결된다는 것, 요릭의 손이 그걸 매번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도 결국 손이다. 이탈리아로 가는 길, 요릭은 낯선 숙녀 일행과 한 방을 쓰게 된다. 침대 사이에 커튼을 치고 몇 가지 조항까지 정한 뒤 잠자리에 든다. 자정 무렵 요릭의 입에서 "오 하느님"이 튀어나오며 실랑이가 벌어지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 팔을 뻗는 순간 어느새 곁에 와 있던 하녀의 엉덩이가 만져지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토록 정교하게 조항을 만들었지만, 어둠 속에서 손이 닿는 것으로 끝난다. 규칙은 머리가 만들고, 손은 그 앞에 먼저 닿는다.


18세기의 주류는 계몽주의였다. 이성과 합리로 세상을 해석하고 표현하던 시기에, 스턴은 인간이 이성이기 이전에 감각의 동물이라고 말한다. 구원은 거창한 견문에도, 돌아와 이룰 업적에도 없다. 손을 뻗어 닿는 순간, 그 작은 접촉으로 채워지는 삶이 있다.


그가 마지막 책에서 택한 것이 비극도 풍자도 아닌 웃음이었다는 점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재기와 풍자가 넘치던 〈트리스트럼 샌디〉와 달리, 스턴은 이 책에서 사람을 더 다정하게 바라보려 했다. 평생 병과 가난에 시달린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끝내 붙든 것은, 세상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작은 웃음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원이란 남길 만한 무언가가 아니라, 지금 손에 잡히는 접촉과 그 곁의 웃음이었다.


애덤 스미스와 괴테가 여행에서 책을 가져왔다면, 스턴은 손길 하나와 작은 웃음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기 이전에 감각의 존재라는 그의 물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AI와 데이터가 인간을 예측하고 엮어내는 시대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그만큼 덜 닿고 덜 마주친다. 접촉보다 연결이 자연스럽고, 닿지 않고도 가까워졌다고 믿는다. 스턴이 끝까지 붙든 것은 우연 속의 마주침이었다. 머리가 결정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손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은 게 언제였던가. 〈감성 여행〉의 요릭은 여전히 낯선 여성의 손을 잡는다. 말보다 먼저, 이성보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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