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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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헤르메스(Hermes)는 킬레네 산 동굴에서 태어난 바로 그날 스스로 강보를 풀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고 전해진다.


갓 태어난 헤르메스는 길을 걷다 우연히 이복형 아폴론(Apollo)이 돌보던 소 떼를 발견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그는 곧바로 아폴론의 소 쉰 마리를 훔치기로 마음먹는다. 소들의 행방이 드러나지 않도록 발굽에 나뭇가지를 대어 거꾸로 걷게 만들고, 자신의 발에도 나뭇잎을 묶어 흔적을 감춘다. 소 떼를 멀리 떨어진 동굴에 숨긴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요람으로 돌아가 얌전히 누워 있었다.


소 떼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아폴론은 흔적을 좇아 헤르메스의 동굴까지 찾아온다. "소를 훔쳐 간 것이 너 아니냐"는 물음에 헤르메스는 "나는 소를 몰고 간 적이 없다"고 태연히 맹세한다. 소들을 거꾸로 걷게 했으니 '몰고 간 것'이 아니라는 교묘한 논리다. 말 그대로 궤변이다. 이 일화는 헤르메스가 속임수와 기지, 교활한 언변의 신이라는 어두운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헤르메스에게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신들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고, 인간의 말을 신들에게 전하는 '전령의 신'이기도 하다. 신들(특히 제우스)의 모호하고 은유적인 메시지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통역하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였다.


벌써 12•3 사태의 1주기가 지났다. 지난 일 년은 각성과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정치를 공익이 아닌 사욕으로 이용한 자를 탄핵하면 나머지 문제들은 자연히 풀리리라 믿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명백한 내란의 정황과 증언들이 차곡차곡 드러나는데도 내란의 수괴는 여전히 괴변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길을 걷는 듯 보이는 사법부를 지켜보는 시간은 답답했다. 법의 언어가 진실을 밝히기보다 은폐하는 데 쓰인다면, 해석의 힘은 공동체를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위험한 무기가 된다.


"해석은 힘이다."

해석학자 폴 리쾨르의 말이다. 리쾨르는 해석이 단순히 의미를 밝히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틀을 설정하고 사건을 규정하는 권력이라고 보았다. 무엇이 '사실'이냐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해석의 기술은 그래서 너무 쉽게 은폐의 기술, 왜곡의 기술이 된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가 목격한 일들은 바로 이 해석의 권력이 어떻게 폭력으로 변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었다.


고명섭의 『카이로스 극장』은 이러한 해석과 권력이라는 문제의식을 한국 정치의 최근 역사 위에 펼쳐놓는 책이다. 저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신화, 그리고 동서양의 인문학적 텍스트를 소환해 지난 3년 반의 정치적 혼란을 해석한다. 플라톤이 경고한 무능한 조타수,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욕망 없는 지성으로서의 법', 헤르메스의 양면적 해석 권력은 모두 한국 사회가 경험한 사건들과 기묘하게 맞닿아 있다.


저자는 이처럼 고전적인 통찰과 현실 정치의 문제를 엮어내며, 우리가 지나온 3년 반의 시간을 수천 년 인류 정치사를 토대로 다시 바라본다.


그리스어에서 시간은 두 단어로 나뉜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가리키는 연속적이고 양적인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변화가 가능해지는 질적이고 결정적인 시간이다. 12•3 사태는 그 카이로스가 우리에게 닥쳐온 사건이었다.


카이로스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공동체가 새로운 눈을 뜨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다시 묻게 되는 결단의 순간이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는 법과 언어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권력이 어떻게 해석을 통해 현실을 다시 쓰려 하는지 똑똑히 목격했다. 결국 카이로스란 진실을 숨기려는 해석의 폭력과 맞서는 시간이며, 공동체가 다시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이다. 『카이로스 극장』은 바로 이 결단의 무대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버릴지, 어떤 해석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선택할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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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 융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인생 수업
최광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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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마흔쯤 되자 내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나는 중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마흔 이후로는 변화가 선택이 아닌 필수이자 생존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


내 삶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 마흔이 막 지나던 그때였다. 아이를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주말은 세 식구 세 끼를 챙기느라 해가 져야 여유가 생겼다. 그런 나에게 변화라니?


어찌 보면 안정적일 수 있는 삶이었지만, 나는 꼬리에 못이 박힌 도마뱀처럼 붙박이가 되어버렸다. 마음은 달랐다.


돌이켜보면 20~30대에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분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인정받고, 성취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그 시절 삶의 중심은 언제나 바깥에 있었다.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고, 사회적 역할을 다하며, 페르소나를 완벽하게 작동시키는 일이 곧 나 자신이라고 믿고 살았다.


40대가 되고 난 후, 알 수 없는 불안이 피어올랐다. 예전에 나를 감싸주던 페르소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삶의 무게는 있는 그대로 나를 짓눌렀다. 몸도 예전 같지 않았고, 감정의 파고도 심했다. 주변 사람과 관계를 풀어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 본 대학에서 가족상담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심리학자 최광현은 그의 책에서 40대의 이런 상태를 '고통'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가 말한 고통에는 희망이 숨겨져 있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젊은 시절이 아니라 중년에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자신의 삶이 어떤 위기도 없이 완벽하다면 자기실현의 과제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고통'을 겪고 있다면, 나로 살기 위한 여정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젊을 때는 무의식의 요소들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삶이 굴러갔다. 욕망도, 두려움도, 슬픔도 한쪽에 밀어두고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중년이 되면 이 방식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솟구쳐 오르고, 호르몬의 변화가 찾아오며, 책임의 무게는 더해진다.


『나로 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바로 이 시기에 닥쳐오는 질문과 심리적 혼란이 왜 찾아오는지를 융의 심리학을 통해 차분히 들려준다.


1장에서는 내 안에 숨어 있던 '다른 나'가 중년에 이르러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다룬다. 융이 말한 '그림자',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 그리고 내면의 반대 성적 인격인 '아니마·아니무스' 개념을 통해, 중년이 마주하게 되는 내적 균열과 자기 이해의 과정을 차근히 짚어낸다.


2장에서는 일상과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대극의 원리를 설명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할 때 어떻게 적대감이나 열등감이 생겨나는지 살피고, 관계는 고정되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통찰을 제시한다.


3장에서는 융의 '집단 무의식'을 꿈, 환상, 신화적 상징을 통해 쉽게 풀어낸다. 똥꿈·개꿈 같은 일상의 이미지와 신화 속 상징들이 무의식의 원형을 드러내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삶의 방향 전환을 암시하는 '힌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꿈에서 등장하는 상징이 왜 개인의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가 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4장에서는 삶의 흐름이 반대 방향으로 전환되는 '에난티오드로미아'를 통해 중년의 마지막 과제가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힘'임을 강조한다. 경쟁·성과 중심의 삶에 치우쳤다면 이제 협동·이타성·여유 같은 반대편 가치를 끌어안아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나는 내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은 많은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다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융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융이 말하듯, 어리석음조차 결국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과거는 더 이상 현재를 가로막는 짐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태도는 세계를 “옳음·그름”, “성공·실패”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시선과 연결된다.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일 수도 있다”라는 관점, 다시 말해 상반된 요소를 함께 견디고 품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융이 말한 성숙의 징표이며, 자아가 전체성에 이르는 과정이다.


융의 고백을 읽고 신기했다.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잦아들기 시작한 순간들이 그의 말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밀려 쓴 내 삶을 매듭짓는 시간들은 길고 외로웠지만 그 순간들이 변화의 시작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다.

무엇보다 “이것이면서 저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은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내가 붙들고 싶은 한 문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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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봅시다 - 월가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 신순규 에세이
신순규 지음 / 판미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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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작가에 대해 사전지식 없이 책을 펼쳤다. 처음엔 그의 화려한 프로필이 눈에 들어왔다.

하버드, MIT, 월가. 이 이름들만으로도 선명한 성공의 서사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의 시작은 달랐다. (아니, 조금이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아홉 살에 시력을 잃은 소년은 열다섯 살에 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낯선 땅에서 위탁가정에 머물며 공부했고,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했다.


궁금한 마음에 그의 첫 책을 찾아보았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의 80퍼센트는 쓸모 없는 것들입니다.”

인간은 대부분의 정보를 시각으로 받아들인다.

보는 순간 이해했다고 믿지만, 그 수많은 화려한 것들 속에서 우리는 종종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친다.

신순규는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화려함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자기만의 기준, 자기만의 중심이 필요하다.

무엇이 진짜 가치 있는 것인지 스스로 가려내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시각장애는 그에게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현실 속에서도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저 지켜만 봐야 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그의 말은 불가능을 거부하는 의지이자, 세상을 향한 조용한 참여의 선언처럼 들린다.


월가의 애널리스트로 일하면서도 그는 경쟁보다 협력을, 성공보다 나눔을 선택했다. 그를 품어준 위탁부모처럼 한국에서 온 보육원 출신 딸을 가족으로 맞이했고,보육원 아이들을 돕는 ‘야나 미니스트리’의 이사장으로 활동한다.

시각장애인 음악가들을 지원하는 ‘벨라음악재단’의 후원회장으로서,음악을 통해 세상과 마음을 잇는 일도 이어가고 있다.


“할 수 있다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봅시다.”

이 문장은 그의 평생을 이끌어온 신념이다.

시각장애를 가진 그에게 양궁을 가르쳐 준 한 교사가 있었다.

활을 잡을 수 있을지, 과녁을 맞힐 수 있을지 주변에서는 의심이 많았지만,

그 교사는 끝까지 “안 된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때부터 그는 누군가 “안 된다”고 말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고 한다.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가능성보다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는다.

실패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많다.

그 벽은 오랫동안 나를 지켜준 습관이자, 동시에 나를 가두어온 틀이기도 하다.


『할 수 있다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봅시다』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와는 전혀 다른 사고의 방향이 신기하고 좋았다.

제목만으로도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저자는 ‘할 수 있는 이유’를 먼저 찾는 사람이고, 나는 ‘안 되는 이유’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다. 그 차이는 작지만, 그 사이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깊은 간극이 있고 삶의 지평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보이는 눈을 가진 나는, 보이지 않는 그에게서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자신을 믿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오늘, ‘안 되는 이유’ 대신 ‘할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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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지음, 새뮤얼 타이탄 엮음, 김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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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향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한 이 '고향'은 등본상의 주소가 아니다. 인간과 세계가 조화롭게 맞닿아 있던 상태, 세계가 자연스럽게 삶의 의미를 건네주던 시대를 가리킨다.


고대의 인간은 그 질서 속에 있었다. 신과 공동체, 전통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가 분명했다. 신이 살아 있던 시대, 사람들에게는 삶의 방향을 비추는 별들이 있었다. 그 별빛 아래에서 호메로스는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그는 신들의 움직임 속에서 인간의 운명을 읽고, 공동체가 간직해야 할 지혜를 노래했다. 이야기꾼은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고 삶의 의미를 건네는 매개자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밤이면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곶감을 훔쳐 먹는 호랑이를 상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던 순간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 교훈과 가치를 담고 있었다. 누군가를 돕는 마음,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질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태도.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겪어보지 못한 세계의 결을 미리 배웠다.


하지만 근대로 접어들며 이 질서는 급격히 무너졌다.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가 오랫동안 공유하던 가치와 서사의 종말을 의미했다. 근대 이후 탄생한 '개인'은 더 이상 하나의 서사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고립된 개인이 이야기 대신 소비하는 것이 소설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소설은 이야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야기는 공동체의 경험에서 우러나와, 구전을 통해 세대를 거쳐 천천히 숙성된 지혜다. 반면 소설은 고립된 개인이 홀로 쓰고 홀로 읽는 장르다. 소설가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세계와 단절된 채 글을 쓰고, 독자 역시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그 텍스트를 소비한다.


소설은 파편화된 삶 속에서 의미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의미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다. 아무리 뛰어난 소설이라 해도 공동체를 하나로 묶던 옛 이야기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벤야민의 『이야기꾼』을 읽으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 사회 20대 남성들의 극우화 현상. 그 이유 중 하나가 어쩌면 '이야기의 상실'이 아닐까. 아렌트는 "고립된 개인은 전체주의가 가장 쉽게 파고드는 존재"라고 말했다. 개인이 낱낱이 흩어지면 타인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연대가 불가능해지고, 고립된 개인은 정치적으로 쉽게 조종된다.


극우적 서사는 바로 이 틈새에서 힘을 얻는다. 흩어진 개인은 자신의 삶을 설명해주고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감각을 줄 명확한 이야기를 갈구한다. 극우 서사는 세계를 흑백으로 나누고, 선과 악,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단순하고 강렬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차별과 혐오는 즉각적인 우월감을 주고, 혼란스러운 현실에 왜곡된 질서를 부여한다.


벤야민이 말한 '경험의 상실'은 이런 취약성과 맞닿아 있다. 공동체의 지혜와 오랜 시간이 축적된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 그곳에 분노와 적대의 언어가 비집고 들어온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일이다. 느리지만 깊이 있는, 타인의 경험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그런 이야기.


그것이 고향을 잃어버린 우리가 별빛 없는 시대에 다시 찾아야 할 작은 빛인지도 모른다.



이야기꾼에세이, 발터벤야민, 현대문학, 에세이,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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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 - 이론물리학자가 말하는 마음껏 실패할 자유
김현철 지음 / 갈매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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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는 꿈이 의사 선생님이예요.”

올케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의사 놀이를 좋아했고, 아이가 원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아이가 진심으로 그 일을 소명처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올케가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그저 웃고 말았다.


의사라는 직업을 진심으로 소명으로서 선택한다면 그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SKY에 입학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노력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값진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모두 의사가 되고 싶어하고, 대학은 서울대·연세대·고려대밖에 없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는가?


이쯤에서 라캉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아이의 욕망의 시작은 대개 부모로부터 비롯된다. 아이는 세상을 처음 마주할 때 부모의 시선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춘다. 부모가 무엇을 부러워하고, 좋아하며, 무엇을 ‘좋은 삶’이라 말하는지 그 말투와 표정 하나하나가 아이의 욕망을 빚어낸다. 그래서 아이의 욕망은 순수하게 자신의 것이기 어렵다.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부모의 시선과 사회의 언어에서 한 발 물러서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길에서 벗어나 보고,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입해보아야만 비로소 ‘나’의 기쁨과 욕망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의 저자 김현철은 그런 몰입의 경험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간 사람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시에 깊이 빠져 김수영의 시를 탐독했고, 로트레아몽에 매료되어 직접 시를 쓰며 시인을 꿈꾸었다. 그러나 고3이 되자 현실적인 고민이 찾아왔다. 몇 달 남지 않은 대학 입시가 그것이었다. 그나마 시와 가장 닮은 학문이 물리학이라고 느껴 인하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시에 이어 물리학에 매료된 그는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독일 유학길에 올라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연구를 이어가는 이론물리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정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그는 말한다.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각자가 만들어가는 고유한 삶의 궤적을 지켜본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책 속에 담았다. 학계를 떠나 유튜버가 된 학생, 물리학을 충분히 공부했다며 다른 길을 택한 학생,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 독일 유학 후 교수가 된 제자까지. 그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비슷해 보이는 길 위에서도 삶의 방향은 무한히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년이면 우리 아이도 고3 수험생이 된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아이에게 밥을 벌어 먹고 사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해왔다. 그 중에는 예술가도 있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노동, 이를테면 목수 같은 기술자의 길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내 마음은 늘 분열되어 있다. 기술자가 되어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이가 SKY에 합격한다면 기쁨을 감추지 못할 것임을 안다.


“만약 서울대에 붙는다면 집 앞 벚나무에 현수막을 걸겠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러니 올케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체제 안에서 안착하고 싶은 본능에 기울어 있다.


책을 읽으며 아이에게 이 책을 꼭 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으로 조언하는 나의 말보다, 아이가 스스로 세상과 부딪히고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찾아가길 바란다.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만의 중심으로 서는 법을, 저자의 이야기 속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기를.


“혼돈을 품은 자만이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혹여 아이가 혼돈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더라도 그 옆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지지할 수 있는 엄마가 되기 위해 나 또한 더 배우고 성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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