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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 - 융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인생 수업
최광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마흔쯤 되자 내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나는 중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마흔 이후로는 변화가 선택이 아닌 필수이자 생존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
내 삶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 마흔이 막 지나던 그때였다. 아이를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주말은 세 식구 세 끼를 챙기느라 해가 져야 여유가 생겼다. 그런 나에게 변화라니?
어찌 보면 안정적일 수 있는 삶이었지만, 나는 꼬리에 못이 박힌 도마뱀처럼 붙박이가 되어버렸다. 마음은 달랐다.
돌이켜보면 20~30대에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분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인정받고, 성취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그 시절 삶의 중심은 언제나 바깥에 있었다.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고, 사회적 역할을 다하며, 페르소나를 완벽하게 작동시키는 일이 곧 나 자신이라고 믿고 살았다.
40대가 되고 난 후, 알 수 없는 불안이 피어올랐다. 예전에 나를 감싸주던 페르소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삶의 무게는 있는 그대로 나를 짓눌렀다. 몸도 예전 같지 않았고, 감정의 파고도 심했다. 주변 사람과 관계를 풀어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독일 본 대학에서 가족상담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심리학자 최광현은 그의 책에서 40대의 이런 상태를 '고통'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가 말한 고통에는 희망이 숨겨져 있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젊은 시절이 아니라 중년에 이루어야 할 과제이다. 자신의 삶이 어떤 위기도 없이 완벽하다면 자기실현의 과제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고통'을 겪고 있다면, 나로 살기 위한 여정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젊을 때는 무의식의 요소들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삶이 굴러갔다. 욕망도, 두려움도, 슬픔도 한쪽에 밀어두고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중년이 되면 이 방식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솟구쳐 오르고, 호르몬의 변화가 찾아오며, 책임의 무게는 더해진다.
『나로 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바로 이 시기에 닥쳐오는 질문과 심리적 혼란이 왜 찾아오는지를 융의 심리학을 통해 차분히 들려준다.
1장에서는 내 안에 숨어 있던 '다른 나'가 중년에 이르러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다룬다. 융이 말한 '그림자',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 그리고 내면의 반대 성적 인격인 '아니마·아니무스' 개념을 통해, 중년이 마주하게 되는 내적 균열과 자기 이해의 과정을 차근히 짚어낸다.
2장에서는 일상과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대극의 원리를 설명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할 때 어떻게 적대감이나 열등감이 생겨나는지 살피고, 관계는 고정되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통찰을 제시한다.
3장에서는 융의 '집단 무의식'을 꿈, 환상, 신화적 상징을 통해 쉽게 풀어낸다. 똥꿈·개꿈 같은 일상의 이미지와 신화 속 상징들이 무의식의 원형을 드러내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삶의 방향 전환을 암시하는 '힌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꿈에서 등장하는 상징이 왜 개인의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가 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4장에서는 삶의 흐름이 반대 방향으로 전환되는 '에난티오드로미아'를 통해 중년의 마지막 과제가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힘'임을 강조한다. 경쟁·성과 중심의 삶에 치우쳤다면 이제 협동·이타성·여유 같은 반대편 가치를 끌어안아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나는 내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은 많은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다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융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융이 말하듯, 어리석음조차 결국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과거는 더 이상 현재를 가로막는 짐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태도는 세계를 “옳음·그름”, “성공·실패”의 이분법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시선과 연결된다.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일 수도 있다”라는 관점, 다시 말해 상반된 요소를 함께 견디고 품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융이 말한 성숙의 징표이며, 자아가 전체성에 이르는 과정이다.
융의 고백을 읽고 신기했다.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잦아들기 시작한 순간들이 그의 말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밀려 쓴 내 삶을 매듭짓는 시간들은 길고 외로웠지만 그 순간들이 변화의 시작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다.
무엇보다 “이것이면서 저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은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내가 붙들고 싶은 한 문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