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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평점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저의 솔직한 생각을 담아 썼습니다.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화면을 응시한다. 전원을 켜고 클릭 몇 번만 하면 멸종한 공룡의 포효부터 아득한 우주 속 판타지까지 눈앞에 펼쳐진다. 그렇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보는 것'에 할애한다. TV를 보고, 넷플릭스를 보고, 아이폰 속 끊임없이 흐르는 숏츠를 본다. 우리를 유혹하는 영상 앞에서 우리는 그저 수동적인 구경꾼이다.
그러나 책은 어떤가? 사각형의 종이 낱장으로 엮인 책은 앞선 유혹자들에 비해 수수하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이 정적인 물건은 언뜻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상황은 반전된다. 영상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보여줄 뿐'이지만, 책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베르베르의 『나는 그대의 책이다』는 대놓고 노골적으로 말을 걸어온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이 책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속삭인다.
“저는 한 권의 책이며 그것도 살아 있는 책입니다. 제 이름은 〈여행의 책〉입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는 가장 가뿐하고 은근하고 간편한 여행으로 당신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뭐랄까요…… 어떤 강렬한 것을 함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순간, 작가와 독자 사이에 흐르던 오랜 암묵적 규칙은 깨진다. 작가는 뒤로 물러나고, 내 손에 들린 종이 뭉치가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며 여행을 떠나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영상 매체가 우리를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가둬두었다면, 이 책은 독자를 ‘그대’라고 부르며 능동적인 모험으로 초대한다.
어쩔 도리 없이 상상 속의 나는 책의 목소리와 함께 한 마리 새가 되어 하늘 위를 날아간다. 가져본 적도 없는 날개로 바람결을 느끼고 창공을 가른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책은 나를 이끌고 공기, 흙, 불, 물이라는 4원소의 세계로 인도한다. 공기의 세계에서 영혼의 자유로운 비상을 만끽하다가도, 흙의 세계에 들어서면 대지 위에 나만의 안식처를 짓는 평온을 경험한다. 때로는 불의 세계에서 내 안의 적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물의 세계에 침잠하며 생명과 우주의 탄생을 목격한다.
이 여행의 목적지는 외부의 우주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대 자신'이다. 책은 말한다. "좋은 책이란 그대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넷플릭스가 스펙터클한 허상을 보게 한다면, 이 책은 활자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 물음은 나의 내면을 넘어,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거대한 계보로 나를 이끈다. 나라는 한 사람의 생명이 만들어지기 위해 존재했던 나의 부모, 조부모,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먼 선조들을 하나하나 조우하게 한다. 그렇게 다다른 종착역은 우주 빅뱅의 사건으로 이어진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말한다. 우리는 세상에 그저 ‘우연히 던져진 존재’라고. 그들의 철학을 처음 접했을 때, 내 존재의 뿌리가 필연이 아닌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꽤나 서늘했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이 낯선 세계에 툭 떨어졌다는 ‘피투성(被投性)’의 자각은 나를 채울 길 없는 허무와 허탈함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론 그들의 철학이 그 허무에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베르베르가 안내하는 우주적 관점에 서는 순간, 이야기는 다르게 쓰여지기 시작한다.
빅뱅과 함께 탄생한 수소 원자들은 수십억 년의 시간을 건너 별의 내부로 모여들었다. 별은 거대한 용광로가 되어 가벼운 수소들을 짓눌러 탄소, 질소, 산소 같은 생명의 원소들을 빚어냈다. 결국 내 몸을 구성하고 피를 돌게 하는 모든 것은 먼 옛날 별의 심장에서 구워져 튕겨 나온 '별의 파편'들이다.
나는 결코 세상에 툭 떨어진 이방인이 아니다. 거대한 우주적 사건들이 억겁의 세월 동안 한 번의 끊김도 없이 이어져 온 끝에 비로소 탄생한 존재다. 나뿐만이 아니다. 너와 우리, 그리고 이 땅에서 숨 쉬는 모든 생명이 이 경이로운 우주적 서사의 주인공들이다.
이 책과 여행 끝에 만난 나의 계보는 이것이다. 나는 단순히 구경꾼이 아닌 별들의 시작과 함께 생겨난 거대한 드라마의 살아 있는 결과물이라는 것. 수수한 종이 뭉치가 건넨 이 노골적인 유혹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별의 기억을 깨웠다.
“독자여, 그대는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세계와 우주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대 자신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