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 공산당 선언’의 허탈함 - 냉철한 현실인식인가, 순진한 낭만주의인가? -

Part 1. 의의

 

  우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보르헤스의 환상을 또 다시 인용해본다. 이 책을 다 읽는 순간, 이 구절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제국의 지도제작술은 완벽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주의 지도는 도시만큼 컸고, 제국의 지도는 주만큼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지도들도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게 되자 지도제작자들은 제국만큼 크고 한 점 한 점이 그대로 일치하는 제국의 지도를 만들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과학에 대한 열정」중)

 

  네그리와 하트는 ‘근대성’에 대한 재성찰을 이 책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현재 세계체제에 대한 비판은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이 책에서 ‘계몽주의’나 ‘근대성’은 두 가지 전통에 기반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근대성을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적어도 두 개의 뚜렷하고 갈등하는 전통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전통은 둔스 스코투스에서부터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내재성의 장소를 발견하고 특이성 및 차이를 찬양하는 르네상스 인본주의 혁명이 주도한 전통이다. 두 번째 전통은 르네상스 혁명의 테르미도르로, 이원론의 구축과 매개를 통해 첫 번째 전통의 이상주의적인 세력을 통제하려고 하며, 마침내는 잠정적인 해결책으로 근대 주권 개념에 도달한다.(196쪽)

 

  이렇게 근대성은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것이 아님에도, 기존의 비판은 두 번째 전통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차이’에 관대함을 보이는 ‘제국’ 앞에서 수많은 체제 비판자들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제국적 인종주의 이론과 근대 반인종주의 이론은 실제로 아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점에서 그 둘을 구별하기 어렵다. 사실상 바로 이 상대주의적이고 문화주의적인 주장이 필연적으로 반인종주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우리의 전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제국적 인종주의 이론은 전혀 인종주의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259쪽)

 

하지만 근대성의 양면성을 파악한다면 이런 표면적인 모순은 당연한 일일 뿐이다. ‘차이의 존중’과 ‘차이의 공고화’는 분명 다른 것이지만, 그 외연은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국적 인종주의는 본질적으로 ‘위계 이론이 아닌 차별 이론(260쪽)’이며 제국은 차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섭’한다. 그리고 그 포섭에는 ‘무시’의 전략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현재 우리사회, 아니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기본적인 패턴과도 일치한다.

 

제국은 타자들을 밀어내기 위해 자신의 경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들을 강력한 소용돌이와 같은 자신의 평화스런 질서 안으로 끌어당긴다. …… 사법적 관점에서 차이는 무시됨에 틀림없는 반면, 문화적 관점에서 차이는 찬양받는다.(267쪽)

 

이런 차이의 포섭은 ‘각각의 노동인구 안에서 언어적, 문화적, 인종적 차이들’을 ‘노동자 조직과 싸우는 무기로서 사용(268쪽)’될 수 있기 때문에, 제국은 ‘차이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들을 긍정하고 그것들을 유효한 명령 장치 속에 배열(269쪽)’한다.


  이 모든 현상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와 ‘제국’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월러스틴을 비롯한 세계체제론자들, 그 외에 현재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19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에서 그 논지를 전개해나가는 반면,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주의와의 단절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언하고 새로운 ‘구성적 사법체계’인 ‘제국’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공통의 적의 본성을 밝히는 것은 본질적인 정치적 과제(96쪽)’인데, 저자들은 기존의 탈근대주의적/탈식민주의적 전략이 이미 낡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역효과를 내고 있음을 지적한다(여기에는 ‘탈근대주의적 차이의 정치’도 포함된다). 즉, 이미 ‘적’은 다른 차원에 가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권력 패러다임, 즉 탈근대적 주권이 이러한 이론가들이 환영하는 잡종적이고 파편적인 주체성들의 미분적인 위계를 통해 근대적 패러다임 및 지배를 대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경우에 근대 주권 형태들은 더 이상 쟁점일 수 없으며, 해방적인 것처럼 보이는 탈근대주의적이고 탈식민주의적인 전략들은 새로운 지배 전략들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 지배 전략들과 일치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지배 전략들을 부지불식간에 강화하기도 한다!

 

이런 인식을 근거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NGO들 조차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제국의 도덕적 개입의 최전선에 있는 힘이 되어왔다(71쪽)’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들도 제국의 신민으로 복무하고 만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저항하고 또 대안을 만들어나간다고 주장하지만 탈근대주의적 전략은 결국 제국의 하부구조를 떠받칠 뿐이다.


  그렇다면 ‘제국’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선 제국의 권력은 특정한 ‘장place’에 고립되지 않는다. 제국은 ‘매끄러운 공간’, ‘우-토피아, 즉 사실상 무장소non-place’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은 생성의 그 출발부터 ‘부패’한다. 이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과 결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이력을 연장시키기 위한 역사적 방법일지라도, 제국주의는 또한 자본주의를 빨리 끝내는 확실한 수단이다.(431쪽)”


  때문에 ‘권력의 장소는 도처에 있지만 또한 어디에도 없다(257쪽)’. 그리고 권력의 중심, 제국의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푸코(혹은 들뢰즈/가타리)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저항논리도 그와 비슷한 것이다.

 

오늘날 투사는 대표자인 체도 심지어 피착취자의 근본적인 인간적 욕구의 대표자인 체 조차도 할 수 없다. 반대로 오늘날 혁명적인 정치적 전투성은 항상 자신의 적합한 형식이었던 것, 즉 대의적인 활동이 아닌 구성적인 활동을 재발견해야만 한다.(520쪽)

 

제국의 권력은 곳곳에 생체적으로 침투하여 있기 때문에 저항 또한 곳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그것은 적어도 자체논리 속에서는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제국에 대한 저항의 핵심은 ‘다중’이다(이 책에서는 ‘multitude’를 ‘대중’으로 번역했지만, ‘다중’이 더 맥락을 살리는 번역인 듯하다). 왜냐고? 제국은 다중을 그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중이 실질적으로 제국을 지배할 때, 혁명은 완수된다. 이것은 오히려 강점을 공략해야한다는 저자들의 기본 전략과 일치한다.

 

실제로는 우리의 욕망과 노동이 제국을 끊임없이 재생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의 주인다.(492쪽)


Part 2. 의문

 

  이런 문제제기는 분명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한계나 모순이 결코 작아 보이지는 않는다.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① NGO의 활동이 역효과를 낸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지나친 ‘상대주의’의 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현재의 체계에서 어디까지가 개입이고 어디까지가 자주인가?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각종 ‘국지전’을 뚜렷한 대안 없이 비난하는 것이 타당한가?

 

② 제국을 하나의 사법질서로 보고 있는데, 과연 이것을 ‘질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그리고 그 사법질서가 사실상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제국주의와 비교할 때 이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부를 만큼 새롭다고 할 수 있는가? 옮긴이의 지적대로, 네그리와 하트는 근대적 요소의 잔재물을 너무 간과하고 있다.

 

③ ‘전 지구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81쪽)’은 분명 경청할만 하다. 하지만 반대로 ‘국제적’이면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저항은 얼마나 현실 가능성이 있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국지전’의 양상을 보면 ‘인터내셔날’에 대한 낭만이 과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저자들이 주장하는대로, 근대적인 ‘대의’ 없이, 무엇을 중심으로 다중이 결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적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는 그들의 외침과는 달리, 이 책을 덮는 순간 적이 더욱 모호해지는 것은 왜일까?

 

④ ‘도주하는 야만인’들이 과연 ‘다중’인가? 저자들은 ‘이동하는 노동’이 저항의 실천이라고 보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도주 혹은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주 혹은 탈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동’ 그 자체가 얼마나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이동한 그들은 또 다시 착취되는 노동력으로 ‘자리잡을’ 뿐이다. ‘한 장소에 계속 머무르며 즐길 수 있는 권리(506쪽)’에 대한 강조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Part 3. 뱀발

 

꽤나 어려운 책으로 올해의 스타트를 끊었다. 읽는데 왜 그리 힘들던지. 솔직히 읽고나서 제대로 이해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_-

어쨌거나 읽었다는데 의의를 둔다. 본문만 치면 500페이지 조금 넘는 책인데, 10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책을 읽은 압박이;;

지루하고도 이해가 어려운 1장을 겨우겨우 넘기고서 2장을 흥미롭게 읽고, 결론을 기대하는 찰나 3장과 4장에서 허무에 빠졌다.

'배부른 소리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사실 네그리의 삶을 놓고 볼 때 결코 '배부른 소리'할 사람은 아니고.

(그는 2003년까지 가택연금 상태였다. 이 책은 2001년에 출간되었고, 현재 영문판은 저작권을 파기하여 파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시대가 그래서 그런가.(응?) 네그리의 다중도, 푸코도, 들뢰즈도, 포스트모더니즘도. 다 배부른 소리 같다.

젠장.

 

어쨌거나 네그리를 오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에, 즉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_-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를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공저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단 두 권의 얇은 만화책을 쓰기 위해 투자된 시간 15년.

이건 분명 의아한 일이지만 책장을 넘겨갈 수록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치 대학살'에 관한 만화다.

이 소재를 다룬 것은 책 뿐만 아니라 영화, 다큐 등 너무나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물론 단순하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지만) 대학살에 대한 내용을 피해자/가해자 구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그 비참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 생존자가 바로 작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는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생존해서 지금 자신의 앞에서 증언을 하고 있는 현재의 아버지까지 적나라할 정도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자신의 모습 또한 빼놓지 않고.

 

좁히기가 너무 어려웠던 아버지와의 거리를 별다른 포장없이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정작 자신이 대표적인 인종차별의 피해자이면서 흑인을 차별시하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거부감과 또 그 반대에 존재하는 죄책감, 연민.

이런 상황들 속에서 작가가 얼마나 고심하면서 이 책을 그려냈을지, 그래서 15년이 넘는 시간이 왜 필요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2권 중에 작가 스스로가 하고 있는 말처럼.

 

내 칠흙같은 꿈보다 더 비참했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게 얼토당토 않게 여겨지는 때도 많아. 그것도 만화로 말야! 내가 소화해 낼 수 없는 정도인 것 같기도 하고 말야. 어쩐지 다 잊어버려야 할 것 같아. 내가 결코 이해할 수도 형상화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 같아. 내 말은, 현실이 만화로 하기엔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지... 너무 많은 게 누락되고 왜곡되는 거지.

 

그냥 솔직하게만 그려요, 여보.

 

내 말은 말이야... 실제 삶에선 내가 이렇게 오래 이야기하도록 당신이 날 내버려 둘 수 없을 거라는 거야.

 

하지만 실제 삶에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조금 오래 '읽어 보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만화책은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마지막 마무리가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아. 그리고 이제 28쇄를 넘어선 이 책. 책 나온지 10년이 넘었는데 표지 디자인 좀 바꿔주면 안되려나;; 아니면 글자 폰트라도 -_-;;

(물론 원작의 표지대로 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저건 좀 --;;)

 

어쨌거나 읽기도 쉬우니 주변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할만한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양미술사 (무선)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이제야 이 책을 다 읽었다. 2월쯤 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거의 반년이나 걸려 읽은 셈;;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이니 가지고 있던 것은 더 오래된 일 -_-;;)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가 없다거나 너무 어렵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책이 그만큼의 명성을 얻고, 곰브리치가 한 분야에서 대가라고 불리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역작.

자신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나 건축물은 도판상으로 꼭 제시를 하면서 차분하고도 맛깔나게 설명해나가는 책이다.

 

하나의 '통사'를 쓴다는 것은 어느 분야나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이 책은 그 어려운 일을 너무도 '쉽게' 해내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특히 16판까지 개정판을 내면서 개정판을 낼 때마다 서문을 다시 고쳐쓰고 쳅터를 추가해서 넣고 하는 점은

그가 마지막 쳅터에서 하는 다음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끊임 없이 수정을 요하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가슴설레이는 기쁨 중의 하나가 아닐까?

 

다 읽고 나서도 언제든지 아무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좋을만한 책.

요새 책 가격을 생각하면 600페이지가 넘는 컬러도판인 이 책의 가격이 비싼 편도 아니다.

 

죽기 전에 이런 책 한 권 써낸다는 것. 정말 멋진 일 같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만이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미국 내에서도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수전 손택의 마지막 저서.

 

보통 책을 읽다보면 크게 3가지 종류의 느낌을 받게 된다.

2가지는 아주 일반적인 느낌으로, 속으로 박수를 쳐가며 동의와 지지를 보낸다던가 아니면 반대로 계속 반박을 해가면서 읽는 느낌.

그러나 이 책은 그 두 가지가 아닌 나머지 한 가지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었다.

그 느낌은 마침 책 뒤, 번역자의 말처럼(어찌 나와 그리 일치할 수 있는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내가 그렇지 못한데, 옳은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해버리는 저자.

재작년이던가 김규항의 책을 읽을 때보다도 더욱 불편했던 책이었으나, 또 역시 그러하기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수전 손택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를 인용하면서 그동안 당연시해왔던 것부터 문제를 삼아야한다고 화두를 던진다.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화두를 던지면서 저자는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신화를 자근자근 깨부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정작 이상한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표된 가장 기억할 만한 사진들을 비롯해, 과거의 그토록 많은 상징적 보도 사진들이 연출된 듯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 사진들이 연출됐다는 것을 알고 나서 깜짝 놀라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것이다.

 

같은 사진이 양극단의 정치적 입장 모두에게서 이용된다는 사실은 이제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내가 살가도의 사진들을 보면서 뭔가 2% 캥기던 느낌에 대하여 수전 손택은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오직 유명인사들만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39개국에서 이주민들의 모습을 찍은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연민'은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만 악행과 살육이 일어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예상을 만들어내며

이 예상은 또 다시 카메라의 렌즈를 '저곳'에만 돌리게 만든다.

그리고 가끔 비춰지는 이 곳의 살육과 저 곳의 살육에 대한 층위를 스스로 만들게끔 한다.

 

그렇다고 수전 손택이 포토저널리즘을 완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무기력한 연민의 문제점은 그 '무기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날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대학교 초년생 때였을까. 종종 도서관 옆에 걸리곤 했던 사진들. 5.18의 만행이나 주한미군의 살육에 관련된 적나라한 사진들.

나는 그 때, 저 사진이 보여주는 참상이 분명 심각한 문제임에는 틀림 없으나, 저 사진을 보고 놀라야하는 나 또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온몸이 처참하게 찢긴 사진과 '**씨가 죽었다'라는 말 한 마디. 사실 그 두 가지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둘 다 한 인간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전달하는 근본적인 면에서는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저 끔찍함에 눈을 돌리고 입으로 신음을 뱉어내며 인상을 찌푸리고, 때로는 분노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가? 나는 이제 저렇게 처참한 모습이 아니면 분노하지도 못하는 것인가?

물론 그 사진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휘젛어 놓는' '최초의 자극'을 제공할 수는 있으나 사실 99.9%,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없다.

 

앞에서 이미 한번 언급했듯이, 수전 손택이 비판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 될 수 밖에 없는 '렌즈' 그 자체가 아니다.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진 채 고통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이미지를 비난해 왔다. 마치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 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지를 통하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본다고 해서 그냥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그들이 겪어왔떤 일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그 이해하지 못함이 '옳다'고 역설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전 손택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벌써 1년 전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

그때 그야말로 '타자'가 되는 굉장한 경험을 했었는데, 그 강의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남성들이 싫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발언의 시작은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였지만.)

상황적으로나 말 자체로나 매우 도발적인 발언인 셈이었는데, 나중에 그 자리에서 그 말의 의미를 부가설명하기도 했지만 나의 이 말은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가 싫다. 라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 곳곳에서 욕을 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것은 나 스스로도 정말 싫어하는 일이다.

(대체 그들이 비난하는 '페미니즘'이란 것은 무엇인가? 비난하는 그들 스스로가 그게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지 궁금하다. 나도 모르기에.

 그들이 증오하고 공격하는(뭐 실제로 '공격'하는 것은 키보드를 두들기고 술자리에서 투덜대는 것 이상이 아니지만)여성부가 페미니즘인가? 웃기는 일이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어차피 여성이 될 수 없는 남성은 자신이 여성이 될 수 없는 한계 아니 특성을 인식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이해가 가지 않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자신을 솔직히 설명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가 필요하단 것이었다.

괜히 주변의 분위기 때문에 혹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하여 페미니스트니 뭐니 떠들어 대고서는

뒤로는(혹은 일상생활에서) 그것과 정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인간들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범위의 한계를 알고, 타인의 입장을 모른다는 고백이 있을 때야 비로소 '역지사지'가 가능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타인을 정말 모를 때야 비로소 '역지사지'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바로 '무기력한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제조건이 아닐까.

 

어쨌거나 간만에 굉장히 불편한 책,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도 불편해져보라고 권할만한 책 한 권을 읽었다.

책 뒷 편에는 수전 손택의 연설과 신문 사설이 실려있다.

9.11이 일어난 2주 뒤, 그 살벌한 '애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라고 외쳤던 그 존경스러운 용기를 볼 수 있었던 사설도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실명은 원래 옮지 않는 것이지만 이 소설 속에서 실명은 온 도시의 사람들을 눈먼 자로 만든다.

어두운 암흑으로 빠져드는 눈멈이 아니라 하얀 눈멈. 아이러니의 극치.

도시전체가 눈이 멀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최악과 최악을 거듭한다.

시작부터 급박하게 시작되어 그야말로 산넘어 산.

읽으면서 너무나 괴로웠지만 끝끝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주제 사라마구가 이야기하는 실명은 그저 신체적인 면에서의 실명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마음에 대한 실명이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눈이라는 기관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기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은 어찌보면 실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싸움이란 건 언제나 실명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직접적인 묘사가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고 상황 자체가 현실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왜 주제 사라마구가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가라고 불리는지 느낄 수가 있다.

직접 보았으나 단어로만 내게 다가오는 '실명'을 여러가지 상황으로 너무나도 실감나게 독자에게 설명하는 그 과정 때문이다.

 

계단이 어두컴컴했으나, 그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는 초조해서 서두르는 바람에 두 번이나 비틀거렸다. 그러나 웃음으로 털어버렸다. 참 나, 눈을 감고도 오르내릴 수 있던 계단인데. 상투적 표현이란 그런 것이다.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무시해 버린다. 예를 들어 이 경우에는 눈을 감는 것과 눈이 머는 것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가를 서서히 제시한다.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그런데 이 고약한 작가는 독자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로 몰아넣고서 '사랑'을 꺼내어든다.

고약한 낙천주의자 같으니라고.

 

내가 과거의 그 여자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조금 전의 그 말을 한 사람은 오늘의 이 여자예요. 그럼 내일의 여자는 또 어떤 말을 할까. 나를 시험하는 건가요.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내가 뭔데 아가씨를 시험하겠소, 그런 일들을 결정하는 것은 삶이오. 그럼 삶은 이미 한 가지 결정을 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를 영화화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금새 이 눈먼 자들의 지옥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눈뜬 자에 대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동시에 주제 사라마구의 경고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움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보기 싫다고 눈을 감고 살 수는 없다. 눈 감은 척하면서 살 수도 없다. 그런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