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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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공산당 선언’의 허탈함 - 냉철한 현실인식인가, 순진한 낭만주의인가? -

Part 1. 의의

 

  우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보르헤스의 환상을 또 다시 인용해본다. 이 책을 다 읽는 순간, 이 구절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제국의 지도제작술은 완벽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주의 지도는 도시만큼 컸고, 제국의 지도는 주만큼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지도들도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게 되자 지도제작자들은 제국만큼 크고 한 점 한 점이 그대로 일치하는 제국의 지도를 만들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과학에 대한 열정」중)

 

  네그리와 하트는 ‘근대성’에 대한 재성찰을 이 책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현재 세계체제에 대한 비판은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이 책에서 ‘계몽주의’나 ‘근대성’은 두 가지 전통에 기반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근대성을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적어도 두 개의 뚜렷하고 갈등하는 전통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전통은 둔스 스코투스에서부터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내재성의 장소를 발견하고 특이성 및 차이를 찬양하는 르네상스 인본주의 혁명이 주도한 전통이다. 두 번째 전통은 르네상스 혁명의 테르미도르로, 이원론의 구축과 매개를 통해 첫 번째 전통의 이상주의적인 세력을 통제하려고 하며, 마침내는 잠정적인 해결책으로 근대 주권 개념에 도달한다.(196쪽)

 

  이렇게 근대성은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것이 아님에도, 기존의 비판은 두 번째 전통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차이’에 관대함을 보이는 ‘제국’ 앞에서 수많은 체제 비판자들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제국적 인종주의 이론과 근대 반인종주의 이론은 실제로 아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점에서 그 둘을 구별하기 어렵다. 사실상 바로 이 상대주의적이고 문화주의적인 주장이 필연적으로 반인종주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우리의 전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제국적 인종주의 이론은 전혀 인종주의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259쪽)

 

하지만 근대성의 양면성을 파악한다면 이런 표면적인 모순은 당연한 일일 뿐이다. ‘차이의 존중’과 ‘차이의 공고화’는 분명 다른 것이지만, 그 외연은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국적 인종주의는 본질적으로 ‘위계 이론이 아닌 차별 이론(260쪽)’이며 제국은 차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섭’한다. 그리고 그 포섭에는 ‘무시’의 전략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현재 우리사회, 아니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기본적인 패턴과도 일치한다.

 

제국은 타자들을 밀어내기 위해 자신의 경계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들을 강력한 소용돌이와 같은 자신의 평화스런 질서 안으로 끌어당긴다. …… 사법적 관점에서 차이는 무시됨에 틀림없는 반면, 문화적 관점에서 차이는 찬양받는다.(267쪽)

 

이런 차이의 포섭은 ‘각각의 노동인구 안에서 언어적, 문화적, 인종적 차이들’을 ‘노동자 조직과 싸우는 무기로서 사용(268쪽)’될 수 있기 때문에, 제국은 ‘차이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들을 긍정하고 그것들을 유효한 명령 장치 속에 배열(269쪽)’한다.


  이 모든 현상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와 ‘제국’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월러스틴을 비롯한 세계체제론자들, 그 외에 현재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19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에서 그 논지를 전개해나가는 반면,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주의와의 단절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언하고 새로운 ‘구성적 사법체계’인 ‘제국’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공통의 적의 본성을 밝히는 것은 본질적인 정치적 과제(96쪽)’인데, 저자들은 기존의 탈근대주의적/탈식민주의적 전략이 이미 낡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역효과를 내고 있음을 지적한다(여기에는 ‘탈근대주의적 차이의 정치’도 포함된다). 즉, 이미 ‘적’은 다른 차원에 가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권력 패러다임, 즉 탈근대적 주권이 이러한 이론가들이 환영하는 잡종적이고 파편적인 주체성들의 미분적인 위계를 통해 근대적 패러다임 및 지배를 대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경우에 근대 주권 형태들은 더 이상 쟁점일 수 없으며, 해방적인 것처럼 보이는 탈근대주의적이고 탈식민주의적인 전략들은 새로운 지배 전략들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 지배 전략들과 일치하며 심지어는 새로운 지배 전략들을 부지불식간에 강화하기도 한다!

 

이런 인식을 근거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NGO들 조차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제국의 도덕적 개입의 최전선에 있는 힘이 되어왔다(71쪽)’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들도 제국의 신민으로 복무하고 만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저항하고 또 대안을 만들어나간다고 주장하지만 탈근대주의적 전략은 결국 제국의 하부구조를 떠받칠 뿐이다.


  그렇다면 ‘제국’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선 제국의 권력은 특정한 ‘장place’에 고립되지 않는다. 제국은 ‘매끄러운 공간’, ‘우-토피아, 즉 사실상 무장소non-place’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은 생성의 그 출발부터 ‘부패’한다. 이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과 결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이력을 연장시키기 위한 역사적 방법일지라도, 제국주의는 또한 자본주의를 빨리 끝내는 확실한 수단이다.(431쪽)”


  때문에 ‘권력의 장소는 도처에 있지만 또한 어디에도 없다(257쪽)’. 그리고 권력의 중심, 제국의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푸코(혹은 들뢰즈/가타리)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저항논리도 그와 비슷한 것이다.

 

오늘날 투사는 대표자인 체도 심지어 피착취자의 근본적인 인간적 욕구의 대표자인 체 조차도 할 수 없다. 반대로 오늘날 혁명적인 정치적 전투성은 항상 자신의 적합한 형식이었던 것, 즉 대의적인 활동이 아닌 구성적인 활동을 재발견해야만 한다.(520쪽)

 

제국의 권력은 곳곳에 생체적으로 침투하여 있기 때문에 저항 또한 곳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그것은 적어도 자체논리 속에서는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제국에 대한 저항의 핵심은 ‘다중’이다(이 책에서는 ‘multitude’를 ‘대중’으로 번역했지만, ‘다중’이 더 맥락을 살리는 번역인 듯하다). 왜냐고? 제국은 다중을 그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중이 실질적으로 제국을 지배할 때, 혁명은 완수된다. 이것은 오히려 강점을 공략해야한다는 저자들의 기본 전략과 일치한다.

 

실제로는 우리의 욕망과 노동이 제국을 끊임없이 재생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의 주인다.(492쪽)


Part 2. 의문

 

  이런 문제제기는 분명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한계나 모순이 결코 작아 보이지는 않는다.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① NGO의 활동이 역효과를 낸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지나친 ‘상대주의’의 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현재의 체계에서 어디까지가 개입이고 어디까지가 자주인가?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각종 ‘국지전’을 뚜렷한 대안 없이 비난하는 것이 타당한가?

 

② 제국을 하나의 사법질서로 보고 있는데, 과연 이것을 ‘질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그리고 그 사법질서가 사실상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제국주의와 비교할 때 이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부를 만큼 새롭다고 할 수 있는가? 옮긴이의 지적대로, 네그리와 하트는 근대적 요소의 잔재물을 너무 간과하고 있다.

 

③ ‘전 지구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81쪽)’은 분명 경청할만 하다. 하지만 반대로 ‘국제적’이면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저항은 얼마나 현실 가능성이 있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국지전’의 양상을 보면 ‘인터내셔날’에 대한 낭만이 과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저자들이 주장하는대로, 근대적인 ‘대의’ 없이, 무엇을 중심으로 다중이 결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적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는 그들의 외침과는 달리, 이 책을 덮는 순간 적이 더욱 모호해지는 것은 왜일까?

 

④ ‘도주하는 야만인’들이 과연 ‘다중’인가? 저자들은 ‘이동하는 노동’이 저항의 실천이라고 보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도주 혹은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주 혹은 탈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동’ 그 자체가 얼마나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이동한 그들은 또 다시 착취되는 노동력으로 ‘자리잡을’ 뿐이다. ‘한 장소에 계속 머무르며 즐길 수 있는 권리(506쪽)’에 대한 강조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Part 3. 뱀발

 

꽤나 어려운 책으로 올해의 스타트를 끊었다. 읽는데 왜 그리 힘들던지. 솔직히 읽고나서 제대로 이해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_-

어쨌거나 읽었다는데 의의를 둔다. 본문만 치면 500페이지 조금 넘는 책인데, 1000페이지 넘는 분량의 책을 읽은 압박이;;

지루하고도 이해가 어려운 1장을 겨우겨우 넘기고서 2장을 흥미롭게 읽고, 결론을 기대하는 찰나 3장과 4장에서 허무에 빠졌다.

'배부른 소리하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사실 네그리의 삶을 놓고 볼 때 결코 '배부른 소리'할 사람은 아니고.

(그는 2003년까지 가택연금 상태였다. 이 책은 2001년에 출간되었고, 현재 영문판은 저작권을 파기하여 파일로 쉽게 구할 수 있다)

시대가 그래서 그런가.(응?) 네그리의 다중도, 푸코도, 들뢰즈도, 포스트모더니즘도. 다 배부른 소리 같다.

젠장.

 

어쨌거나 네그리를 오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에, 즉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_-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를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공저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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