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잔혹사 - 폭력 공화국에서 정의를 묻다
김동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지금보다도 훨씬 폭력이 일상적이었던 나의 학창시절(물론 그 이전의 시대는 더 했을테지만). 유독 강하게 기억이 남아있는 체벌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미술시간이었고 실습이 아닌 이론 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옆에 앉은 친구와 수업시간에 잡담을 하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그렇게 떠들고 있는 걸 몇 번을 참았을 미술 선생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거기 떠드는 놈들, 앞으로 나와!"라고 외쳤다. 우리는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고개를 약간 숙인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교단 쪽으로 나갔다. 수업시간에 그렇게 떠들어 놓고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 '불온'해 보였던 것일까? 나는 태어나서 받아보지 못한 체벌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불온'이라는 단어는 "통치계급 또는 기성세력의 입장에서 보아 사상 · 태도 등에 맞서고 대립하는 기질이 있음"으로 되어 있다. 즉 불온의 여부는 확실히 권력을 가진 사람의 자의적 판단에 좌우된다. 또 권력자는 자신의 명을 거역할지 모르는 모든 하급자에게 '불온'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불온은 전형적인 전근대적 정치 용어이지 법률 용어가 아닌 것이다. (151쪽)

 

미술 선생님은 불려나온 우리 둘을 마주세웟다. "정일영, 너부터 뺨 한 대 때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팔을 들어 친구의 뺨을 살짝 쳤다. "장난해? 세게 때려." 이번엔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여전히 손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또 한 번 뒤에서 미술 선생님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조금씩 힘을 주면서 서로의 뺨을 때린다. 결국 몇 분간 서로의 뺨을 때리다 보면, 남는 것은 붉게 상기된 뺨과 맞지도 않았는데 함께 상기된 얼굴과 이상하게 그렁그렁대는 눈빛과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보지 못하는 두 명의 '친구'만이 남게 된다. 이유도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서로 구타를 한 셈이 되었으니 원망 비슷한 감정도 들고 자책 비슷한 감정도 생긴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답을 하기 쉽지 않다. 아니 답은 없다. 사실 실질적인 가해자(혹은 처벌자)는 우리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으니까.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두 개의 문]이 내게 유독 좋았던 이유는, 제대로된 질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과 현장의 경찰들을 이분법으로 대비시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묻지 않았다. 사실 이 사건에 관련된 많은 논쟁은 투입된 경찰들이 과잉진압을 한 것이냐 혹은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냐의 소모적인 논쟁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시위대 쪽이나 현장 경찰 양쪽 모두에게 위험천만한 과잉진압 명령을 내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명령은 직접 명령을 내린 사람의 책임만이 아니라 더 위에서 '비명령적 명령'을 내린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을. 아니, 가장 위에 있던 사람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것을.

 

흔히 최고 권력자는 명령이 아닌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는데 이를 '비명령적 명령'이라고 한다. 즉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지 않더라도 평소 방침과 발언, 인사, 포상과 처벌을 보고 아랫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어떠헥 해야 칭찬받는지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물론 최고 명령자는 직접 발언을 통한 우회적 강조뿐만 아니라 무관심 · 침묵 · 불개입을 통해서도 영향을 준다. 즉 대통령이 노동자 파업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도 진압 때 인명 피해가 없도록 하라는 당부를 추가하지 않는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진압하라는 암묵적 지시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신속히 진압하라고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법을 어기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면, 경찰 총수는 진압 작전 때 발생할지 모른는 '부수적 피해'는 절대 자기 책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판단하며 오히려 강하게 진압하지 않을 경우 문책당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124~125쪽)

 

  그렇다면 사설 용역업체를 공권력 행사에 동원하고, 그 전부터 용역의 폭력을 묵인한 채 시공업체가 절실히 원하는 일을 수행한 경찰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는 앞의 경찰청 차장의 발언 속에 답이 있다고 본다. 이들이 도심 대로변에서 무장하고 있었다는 지적 말이다. 농성자들이 실제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경찰이 몰랐을 리 없다. 초점은 이들의 무장을 '인내를 갖고' 두고 볼 수 없기에 긴급해 해산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항의 농성이 모든 행인에게 보였고, 이는 정부의 법질서 확립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문제는 이들이 시민에게 주는 피해가 아니라, 이들의 무장 농성 자체가 행인에게 부각되어 공권력이 무력화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106쪽)

 

알아서 기는 개들. 요즘 경찰이나 검찰이 듣는 욕 중 하나다. 저렇게까지 해서 권력에 빌붙고 또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싶을까, 정도에서 생각이 그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오늘날 공권력의 사영화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봐야한다고 말한다. '공권력'.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공권력은 "국가공공 단체우월한 의사주체로서 국민에게 명령하고 강제할있는 권력"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민들의 합의 하에 국가에게 폭력 행사권을 부여한 것이다. 때문에 그 폭력은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피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역사를 훑어보면, 공권력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된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격한 시위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정적을 제거하거나 독재에 항거하는 인사들을 고문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공권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잔인한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반복과 순환은 광복을 맞이했던 그 시절, 사상적인 좌표와는 상관없이 '공적 정신을 가진 인간'들을 무차별로 토벌하고 싹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적 정신을 가진 인간, 즉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을 했다가 살아남은 사람이나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던 청년, 주민을 위해 일한 구장 · 반장, 행정 말단 지도자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돈을 지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항일 경력과 해방 직후 지역 정치 참여는 공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에 기초한 것으로,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 판단할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한 학살은 흔히 생각하듯 한국 정치에서 '좌익의 소멸사'가 아니라, 친일 경찰과 군인에 의한 옛 항일운동가들의 수난사이자 우리 역사 최대의 공적 인간 소멸사라 해야 옳다. (76쪽)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폭력이 그 싹을 자르는 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침묵한 자들은 자책으로 마음 속에 상처를 가득 만들거나, 반대로 자신을 합리화할 수 밖에 없다. 그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가 되고, 우리 모두의 손은 더욱 더러워져간다. 이 현상이 지속될 수록, 침묵한 자들의 반응은 합리화 혹은 무시라는 선택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가해자의 폭력이 반복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폭력 상황에서의 방관자, 정확히 말하면 다수, 즉 따돌리는 편에 서는 폭력의 묵시적 동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79쪽)

 

예나 지금이나 개인의 소신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중간의 입지를 견지하려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 포악한 권력 앞에서 자기주장을 폈다가는 함께 따돌림을 당할 위험이 있는 전체주의 · 집단주의 사회에서 사회 폭력은 창궐한다. (87쪽)

 

어쩌면 폭력이나 부당함에 쪼잔할 정도의 민감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폭력의 싹을 자르지 않으면 어느새 엄청나게 성장한 폭력으로 다가와 우리의 입을 막아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은 사항에 대해선 너도 나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나게 덩치가 커졌을 때, 그에 대해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쉬울 때에 대처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한 번 봐주고 넘어가다 보면,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기회는 모두 사라질지도 모른다. 때문에 '자유주의'라는 말, 그리고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사실상으로는 자유가 아닌 면책 혹은 무관심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면이 있다.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그 질문에는 관심이 없다.

 

냉전시절 자유주의에 대해 앤서니 아블라스터(Anthony Arblaster)는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혁명가이거나 혁명에 동조하는 자들이라기보다는 반혁명자일 개연성이 더 높다.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에 가까워졌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찍이 러시아의 사상가 알렉산드르 게르첸(Aleksandr Gertsen)은 한국의 앞날을 예견하듯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에서 공화국도 원한다. 공화국이 자신들이 바라는 온건한 범위를 넘어서면 그들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행복하게 혁명이라는 관념을 즐긴다. 그러나 1848년 인민 폭동의 광풍 앞에서 공포에 질려 후퇴했다. 그러고는 형제들로부터 문명과 질서를 구하기 위해 계엄령의 총검 뒤에 숨었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53~54쪽)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폭력 그 자체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으로 자위할 것이다. 미술 선생님이 서로의 뺨을 때리라고 했을 때 왜 저항하지 못했느냐, 결국 친구의 뺨을 때린 것은 너 아니냐,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어떤 아이는 똑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저항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당시의 학교 분위기에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때 누가 어떻게 행동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과거에 어떤 행동이 있었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오늘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개인의 광기나 폭력성이 사건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었는가를 봐야한다. 그렇게 해야만 지금 일어나는 사건을 똑같은 사건 혹은 비슷한 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고, 그것을 반대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잔혹한 고문의 현장을 두고, 그 고문을 왜 이겨내지 못했느냐, 너는 왜 김근태가 되지 못했느냐라고 말하는 건 문제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비켜나가는 것이자 또 다른 폭력이다. 고문이나 폭력이 왜 문제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캐내지 않고,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일은 너무 나도 쉽고 또 실제로도 너무 많다(자칭 자유주의자 고종석이 최근 성희롱 문제를 두고 트윗으로 했던 말들이 그걸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건 고종석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즉 고문은 평소의 생각과 신조를 의심하여 처벌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혹은 이를 의도적으로 자작해 권력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중세식 폭력이고, 폭력에 굴복해 원하지 않는 말을 하거나 동료의 이름을 댄 피해자들에게 치욕과 수모를 안김으로써 이들을 정신적으로 파괴해 주변 사람들 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이중적 폭력이며, 고문당한 사람들의 초췌한 얼굴, 절뚝거리는 발걸음, 망가진 신체를 목격하거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체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을 두려워하고 복종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삼중의 폭력이다. (234~236쪽)

 

  '적의 재산', 주인이 없는 재산을 국가가 접수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재산은 법에 의거해 공적으로 관리 ·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폭력으로 탈취한 것이라면 시효를 적용하지 않고 돌려줘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공권력은 약점 있는 사람을 초주검이 되도록 마구 두들겨 패고, 사기범 ·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숨도 못 쉬게 해놓고, 세월이 지나 피해자와 가족들이 재산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하면 시효가 지났다면서 "왜 그때 권리 주장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적반하장 격으로 되묻는다. (197쪽)

 

피의 땅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현대 한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뭍고 있다. 그 고통과 죽음은 다시 침묵을 만들었고, 지금 우리는 그 진상의 대부분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 책은 화가 나면서도 부끄러워지는 대한민국의 잔혹사를 이야기한다. 추상적인 단어를 나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례들을 들어가면서 설명한다. 이건 이미 [전쟁과 사회]에서 보여줬던 저자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매우 불편하고 고개를 돌리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잘못이 자행될 가능성을 키우게 될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과거에 벌어졌던 정도의 폭력에 휩싸여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야만의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면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아야하고, 끊임없이 현재를 감시해야만 한다. 공권력을 공권력답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열악한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또 무엇보다 다시 억울한 국민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의 잔혹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민'은 하나의 정치 공동체 구성원이다.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생긴 타인의 문제가 내 일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우리 사회 내부의 일도 남의 일로 치부하면서,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도의적 책임을 지고 반성하라는 이야기를 과연 할 수 있을까?

 

 일본의 전후 세대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과거사 반성을 요구하면, 왜 아버지 · 할아버지 세대의 일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묻는다. 이에 대해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일본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일본인이란 혈통을 물려받은 일본인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일본인이다. 정치 공동체 구성원인 모든 일본인 즉 전후 세대는 일본 국가가 국민에게 주는 각종 혜택의 수혜자이고 주권자로서 일본의 정치에 참여하기 때문에 결정 과정에 책임이 있는 주체라는 것이다.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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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13-06-09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너무 훌륭한 리뷰입니다 특히 미술시간에 혼나신거랑 두새의문 언급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