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미국 내에서도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수전 손택의 마지막 저서.

 

보통 책을 읽다보면 크게 3가지 종류의 느낌을 받게 된다.

2가지는 아주 일반적인 느낌으로, 속으로 박수를 쳐가며 동의와 지지를 보낸다던가 아니면 반대로 계속 반박을 해가면서 읽는 느낌.

그러나 이 책은 그 두 가지가 아닌 나머지 한 가지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었다.

그 느낌은 마침 책 뒤, 번역자의 말처럼(어찌 나와 그리 일치할 수 있는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내가 그렇지 못한데, 옳은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선적으로 해버리는 저자.

재작년이던가 김규항의 책을 읽을 때보다도 더욱 불편했던 책이었으나, 또 역시 그러하기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수전 손택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를 인용하면서 그동안 당연시해왔던 것부터 문제를 삼아야한다고 화두를 던진다.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화두를 던지면서 저자는 포토저널리즘에 대한 신화를 자근자근 깨부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정작 이상한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표된 가장 기억할 만한 사진들을 비롯해, 과거의 그토록 많은 상징적 보도 사진들이 연출된 듯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 사진들이 연출됐다는 것을 알고 나서 깜짝 놀라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것이다.

 

같은 사진이 양극단의 정치적 입장 모두에게서 이용된다는 사실은 이제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내가 살가도의 사진들을 보면서 뭔가 2% 캥기던 느낌에 대하여 수전 손택은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오직 유명인사들만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39개국에서 이주민들의 모습을 찍은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연민'은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만 악행과 살육이 일어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예상을 만들어내며

이 예상은 또 다시 카메라의 렌즈를 '저곳'에만 돌리게 만든다.

그리고 가끔 비춰지는 이 곳의 살육과 저 곳의 살육에 대한 층위를 스스로 만들게끔 한다.

 

그렇다고 수전 손택이 포토저널리즘을 완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무기력한 연민의 문제점은 그 '무기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날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대학교 초년생 때였을까. 종종 도서관 옆에 걸리곤 했던 사진들. 5.18의 만행이나 주한미군의 살육에 관련된 적나라한 사진들.

나는 그 때, 저 사진이 보여주는 참상이 분명 심각한 문제임에는 틀림 없으나, 저 사진을 보고 놀라야하는 나 또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온몸이 처참하게 찢긴 사진과 '**씨가 죽었다'라는 말 한 마디. 사실 그 두 가지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둘 다 한 인간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전달하는 근본적인 면에서는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저 끔찍함에 눈을 돌리고 입으로 신음을 뱉어내며 인상을 찌푸리고, 때로는 분노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가? 나는 이제 저렇게 처참한 모습이 아니면 분노하지도 못하는 것인가?

물론 그 사진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휘젛어 놓는' '최초의 자극'을 제공할 수는 있으나 사실 99.9%,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없다.

 

앞에서 이미 한번 언급했듯이, 수전 손택이 비판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 될 수 밖에 없는 '렌즈' 그 자체가 아니다.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진 채 고통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이미지를 비난해 왔다. 마치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 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지를 통하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본다고 해서 그냥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그들이 겪어왔떤 일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그 이해하지 못함이 '옳다'고 역설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전 손택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벌써 1년 전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

그때 그야말로 '타자'가 되는 굉장한 경험을 했었는데, 그 강의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남성들이 싫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발언의 시작은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였지만.)

상황적으로나 말 자체로나 매우 도발적인 발언인 셈이었는데, 나중에 그 자리에서 그 말의 의미를 부가설명하기도 했지만 나의 이 말은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가 싫다. 라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 곳곳에서 욕을 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것은 나 스스로도 정말 싫어하는 일이다.

(대체 그들이 비난하는 '페미니즘'이란 것은 무엇인가? 비난하는 그들 스스로가 그게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지 궁금하다. 나도 모르기에.

 그들이 증오하고 공격하는(뭐 실제로 '공격'하는 것은 키보드를 두들기고 술자리에서 투덜대는 것 이상이 아니지만)여성부가 페미니즘인가? 웃기는 일이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어차피 여성이 될 수 없는 남성은 자신이 여성이 될 수 없는 한계 아니 특성을 인식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이해가 가지 않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자신을 솔직히 설명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가 필요하단 것이었다.

괜히 주변의 분위기 때문에 혹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하여 페미니스트니 뭐니 떠들어 대고서는

뒤로는(혹은 일상생활에서) 그것과 정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인간들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범위의 한계를 알고, 타인의 입장을 모른다는 고백이 있을 때야 비로소 '역지사지'가 가능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타인을 정말 모를 때야 비로소 '역지사지'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바로 '무기력한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제조건이 아닐까.

 

어쨌거나 간만에 굉장히 불편한 책,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도 불편해져보라고 권할만한 책 한 권을 읽었다.

책 뒷 편에는 수전 손택의 연설과 신문 사설이 실려있다.

9.11이 일어난 2주 뒤, 그 살벌한 '애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부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라고 외쳤던 그 존경스러운 용기를 볼 수 있었던 사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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