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의 삶 (양장) - 김민철 파리 산문집
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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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직장인의 기본템.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다닌다는 그것. 그러나 대부분의 이들에게, 사표는 '잇 아이템'이 아니다. 비극적이게도 사표는, '좋아서' 품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싫어서' 품고 다니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겠지만, 사표가 아름다워 그것을 지니고, 마음에 품고 다니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은 최후의 보루, 마지막 나를 지켜줄 보호막. 그렇기에 이 아이템을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표는 나를 위한 보호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실패의 인정을 상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매일 일상 시간에 나갈 곳이 있다는 것, 직장이 부여하는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 무엇보다 매달 같은 날에 생활을 영위할 금전적 보상이 마련된다는 것, 그러니까 내 삶의 '정형'을 잡아주는 너무나도 견고한 틀,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리에서 두 달 살기. 하루 저녁의 약속처럼 가벼운 바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이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삶의 '정형'이 가진 힘은 대단하여, '못 이룰 것도 아닌' 그 바람은 작가의 마음 속에 20년간 작은 불꽃으로 남이있을 뿐이었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그 불꽃은 "꺼지지 않도록 애지중지 보살피며, 현실이 힘들 때마다 그 작은 불꽃 옆에서 잠깐씩 손을 녹"이는 것이었고, "그 작은 불꽃이 삶을 대단히 바꾸는 일 같은 건 일아니지 않았다."(262쪽) 그러나 작가는 그 불꽃, 그토록 전염성이 강한 '좋아하는 마음'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만은 여전히 오랜 시간 지켜왔고, 그것이 20년간 정형의 삶을 버티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20년간 바라왔던 다른 모양의 삶은, 어쩌면 정형의 삶마저 고이 보듬고 충실하게 대면했기에 맞이할 수 있는 또 다른 국면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실은 정형의 삶도 제각각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모양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무정형 또한 결국 또 하나의 모양이고, 또 다시 바뀔 수 있는 법. 중요한 건 모양 자체가 아니라, 그 모양을 만드는 데에 내가 얼마나 개입하느냐, 바로 그것일 테다. 파리 산문집이지만, 파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살고자 하는 삶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는 각자의 특별한 장소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파리가 그러했듯, 잊고 살았던 가슴 속 꿈과 바람은 각자만의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장소는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가슴 속에 품고 다녀야할 것은 사표와 같은 지루한 마침표가 아니라, 내가 나의 삶을 위해 써내려 갈 진솔한 문장을 이끌 수 있는 나만의 단어, 나만의 문장 하나일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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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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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와 민주가 부모님과 여름휴가를 떠나느라 성당에 나오지 않은 일요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의 노력이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서로 다른 일요일을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날 내가 느낀 감정은 배신감이 아닌지도 모른다. (49쪽)

다들 지나온 시간이기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그리하여 다시 내가 지나온 시간이 어떤 시간인지를 잊기는 얼마나 또 쉬운가. 그리고 내가 거쳐온 시간만이 그 시절을 거쳐야하는 방식의 전부가 아님을 잊기는 또한 얼마나 편한가. 무겁기만한 시절은 아닐 테지만, 나는 청소년기를 다루는 영화나 소설을 읽는 것이 매우 두렵다. 읽는 순간에도 곳곳에서 진행되는 현실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최진영 작가의 서늘한 문장이 과도하게 무겁지는 않지만, 어디서 벌어졌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너무나도 평범한(!) 설정이기에 읽는 내내 답답함을 지우기 어렵다. 그럼에도 마지막 이야기는 그나마 '선택'이 있는듯하여 숨을 좀 돌린다.

작가의 말을 보건데, 얼마나 고민이 많았고 조심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에 고이 모신 청소년 당사자의 에세이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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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들
미깡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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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맥락의 거짓말을 테마로 한 단편선. 단편선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처음 세웠던 큰 기둥이 보이는듯 하고 그 기둥이야말로 놀라운 지점이다. 물론 그 기둥을 세우기 위한 디테일도 놀랍기 그지 없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조차 인물과 에피소드를 간편히 소모해버리는 작가가 있다. 아니, 많다. 때로는 기둥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쉽게 쓰고 버려버린다. 하지만 미깡 작가는 피로한 소모 없이 기둥을 쌓아올린다. 공들여 만든 인물과 에피소드가 스스로 기둥을 쌓아올리는 느낌이다.

그러니 결국, 이 책은 진실을 말하기 위한 '거짓말들'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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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로 건너가는 법
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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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우는 것을 나의 본업으로 삼자는 다짐"(9쪽)


먹고살자면, 일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운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또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일과 자아실현이 일치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 또한 녹녹치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먹고산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그 끈적함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할 것 같다. 대체 왜 이런 걸까?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대체 누가 태어나자마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렸을 적 하고 싶은 일을 업으로 삼고 산다는 말인가?(어렸을 때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하라고 하면 행복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 바로 '내 일'이 아닌 걸(정확하게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일이 아니잖아." 얼마나 쉬운 말이며 편한 말인가. 직장인들 치고 '내 일'이 많은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어떤가? '내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는 일을 평생해야 한다면? 세상에, 이 또한 끔찍하기 그지 없다. 기계적으로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흥미도 없고 의지도 없으며 동의조차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드물다. 다들 경험이 있을 테니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괴로운 경험은 대부분 위에서 떨어지는 '오더' 때문이라는 것도 다들 잘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그 '오더'는 누가 내리는가? 다름 아닌, '사수'(난 이 말을 정말 싫어하지만), 상사, 팀장.


이 책을 쉽게 말하자면, 좋은 팀장이 되는 법, 아니, 좋은 팀을 만드는 법, 아니, 좋은 팀을 만들어서 일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법, 아니, 일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행복한 나의 삶을 꾸리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좀 신기한 건, 팀원을 관리하는 팀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변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이런 책이라면, 골치아픈 직원에게는 어떻게 대처해야하고, 까다로운 임원에게는 어떻게 대처해야하고... 라고 이야기하기 마련. 하지만 이 책은 변수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상수를 이야기한다. '나'라는 상수. 어떤 직장에 가든 나는 존재하고(아, 슬프게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상수다. (이 표현은 수학적으로야 틀린 말이겠지만) 작가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변수를 논하기보다는 상수를 어떻게 빌드업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완벽한 상수 만들기에 관한 책인가? 또 신기하게도, 그렇지도 않다. 완벽한 팀장이 되어라!, 라고 외치기 보다는 "완전한 자아는 완벽한 자아가 아니다"(79쪽)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찌하라는 것인가? 다양한 이야기가 책 속에 있지만, 결국은 이것인듯 하다. "팀장이여, 팀원이 되어라."


생각해보면, '우리 팀'을 밥먹듯 이야기하는 팀장들 중에 자신을 '팀 로스터'에 올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욕하는 팀장은 대부분 그런 팀장이다. (이해도 되지 않는) 오더를 내리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그런 팀장. 그러면서도 팀에 대한 불만은 가장 큰, 그리고 그 불만을 가장 큰 목소리로 매일 이야기하는 그런 팀장. 그렇기에 우리는 팀과 '안전'을 쉽게 연결짓지 못한다. '위험' 때문에 욕하지만, '안전'을 최상의 가치로 꼽지도 못했던 것이다.


팀원은 팀 안에서 안전해야 하니까. (82쪽)


나는 우리 팀이 안전해서 좋다. 우리 팀이 안전하다는 사실이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줘서 안심이다. (88쪽)


이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 책이 일종의 노하우를 이야기하는 '실용 에세이'면서도 '나'라는 주어만큼이나 '우리'라는 주어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라는 주어와 '우리'라는 주어를 가려서 써야 하는 자리가 바로 상사의 자리다. '나'라는 주어를 쓰면서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고, '우리'라는 주어를 쓰면서 모두에게 이 일의 책임을 나눠주는 일. 바로 그 일을 하라고 회사에서 팀장에게는 조금이나마 월급을 더 주는 것이니 말이다. (134쪽)


우리는 패배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승리의 이유도 알지 못한다. 패배할 때와 마찬가지로 승리할 때에도 우리는 최선의 공을 던졌으니까. 다만 우리가 그 시간을 보내며 우리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만을, 단단히 결속된 우리 사이에 패배감이 앉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201쪽)


그간 사적인 에세이를 써왔던 작가가 낸 신간으로는 조금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0년도 더 전에 '회의'를 이야기했던 작가가 '우리 팀'을 이야기하는 건, 어쩌면 그리 어색한 맥락이 아닐지도. 게다가 (혹은 당연히) 우리 팀에 뼈와 살을 갈아넣으라는 메세지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취향'을 이야기했던 작가답게 결국은 현재의 '내 일'을 통해 내일의 '내 일'로 건너가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소소한 에피소드와 개성 있는 디자인과 삽화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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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 백
후지모토 타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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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뒤를 (올려다)보며 따라간다는 것, 그러니까 성장. 누군가가 나의 뒤를 바라볼 것이라고 인식하며 행동하는 것, 이 또한 성장. 너무나 다른 일이지만, 그 둘은 공통점이 있다. 전자는 고지를 바라보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면, 후자는 어쨌거나 내가 나아가야한다는 의무감을 준다는 것에서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 만화는 '성장만화'라고 불릴만도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 만화를 단순한 성장만화로 이야기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만화의 기본, 바로 연출이다. 작가는 연출을 통해 이 만화를 단순하게 만들지 않는다. 굳이 평행이론이니 뭐니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만화는 이미 독자 속의 그 무엇인가를 건드린다.

이렇게 섬세한 필체의 만화를 본 지도 참 오래인데(물론 소재로 쓰이는 네 컷 만화는 아즈망가대왕을 생각나게했지만서도...), 주인공이 비를 맞으며 환희에 젖는 그 장면은 놀랍고도 놀라웠다(이 또한 연출의 힘).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만, 존재도 알지 못했던 책을 선물 받을 수 있는 행운은, 뭐, 때로는 자랑할만도 하다. 오랜만의 책 선물이었고, 오랜만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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