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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를 분석할 때 너무 깊숙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역사의 인과 관계는 흔히 단순한 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랠프 월도 에머슨
"다 똑같은 놈들이야." 정치, 혹은 정치인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 이런 말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거나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언듯 맞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한편에서는 답배값이라도 오를라치면 분노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정말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고, 그래서 누가 되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걸까?
책 제목만 보면, 왠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정치가가 다른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씌여진 책일 것만 같다. 그러나 의외로 이 책의 저자는 의사다. 그리고 이 책을 쓰기 시작하게 된 계기도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라 순전히 의학적인 이유였다. 즉 살인이나 자살이 왜 발생하고 또 왜 급증하기도 하고 급락하기도 하는지에 대해 연구를 하다가 '정치'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의사로서 내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생사의 문제였지 정치가 아니었으며, 정치 주체에 연결된 우연한 발견을 통해 정치를 들여다보는 시도 또한 어디까지나 무엇이 이런 죽음을 낳고 어떻게 하면 아까운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를 알아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23쪽)
저자는 미국에서 한 세기 동안 수차례 '전염병 수준'의 치사사건(여기서는 살인사건과 자살사건을 합쳐서 이렇게 칭한다) 발생률이 나타났다는 것을 발견하고 큰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전염병'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저자는 우연히 이 죽음의 그래프가 정치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 그래프는 상승하거나 하락했기 때문이다. 평균 수치로 봤을 때 상쇄되어 드러나지 않던 것이 누적수치로는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적어도 그래프만 봤을 때 공화당이 죽음의 정당이라는 칭호를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자는 이 우연한 일치를 두고 곧바로 결론을 내지 않고 다시 출발한다. 과연 이 통계를 유의미하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검증절차에 들어간 것이다. 통계에 오류는 없는지, 그리고 만약 정권이 바뀔 때 이 수치가 변화하는 것이 맞다면 그것은 또 왜 그런지, 인과관계의 연결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지, 책의 초반에는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검증에 매달린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공화당이 집권하면 사람들이 더 많이 죽어나가고 민주당이 집권하면 그런 현상이 줄어든다는 건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놀라운 일은 사실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왜 공화당이 집권할 때 치사사건이 급증하게 되는가?
"가진 분들과 더 가진 분들을 이렇게 뵈니 감개무량합니다. 여러분을 엘리트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여러분을 저의 기반이라고 부릅니다." - 조지 W. 부시
이런 말들이 언론을 탈 때, 흔히 '실언' 또는 '망언'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실은 이런 실언과 망언이야 말로 저들의 투명한 진심이다. 우리가 집중해서 들어야 할 말은 저들이 진지하게 하는 말들이 아니라 평소에 쉽게 하는 실언과 망언인 셈이다(우리 각하들, 의원나리들의 실언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제일 앞에 제시한 랠프 월도 에머슨의 말처럼 깊게 분석할 것도 없이,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생각해보자.
자본주의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자본주의의 으뜸 가는 철학적 옹호자였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벌써 이 경제 체제의 결함 하나는 수요 공급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실업률이 높은 경제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고용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야 '노동 비용', 곧 고용자가 사람들이 고용자를 위해 일하도록 설득하려면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체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 저마다 느끼는 바가 있고 바라는 바가 있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저 사고팔 수 있는 상품, 고용자가 보기에는 더 비싸거나 덜 비싸다는 차이밖에 없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피고용자(노동자)보다 고용자(자본가)를 옹호하고 또 피고용자보다 고용자한테서 지지를 받는 정당은 실업률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 정책을 추구해야 남는 장사가 된다. (75~76쪽)
칼 마르크스니 아담 스미스니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더 싸게 노동자를 부려야만 이득이 더 남는다. 그리고 그럴 때야만 노동자들끼리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더욱 피터지게 싸울 것이고, 서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최근 사업장 곳곳에서 드러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를 들여다보라. 정작 이 구조를 만든 당사자들은 뒤에 빠져 있다는 걸 잊는다.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힘을 가진 자들이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앏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한 이 집단은 부자들을 상대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구를 소수의 최상류층과 절대 다수의 어려운 사람들로 양분하는 사회/경제 체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98~99쪽)
그래서 저자는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린다. 저들이 일부러 살인과 자살을 늘린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고. 뭔가 음모론 같은가? 그렇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살인과 자살을 유도하는 정책을 쓴다는 건 억지처럼 들린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이 긋는 선을 잘 봐야 한다. 그는 일부러 이런 정책을 써서 살인과 자살을 늘린다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도움이 된다고 했을 뿐.
살인율 증가가 어떻게 인구의 못사는 99퍼센트를 갈라놓아서 잘사는 1퍼센트한테 유리하게 작용할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 법이 범죄라고 규정하는 폭력의 대다수는 가난한 사람이 저지르므로, 폭력 범죄가 늘어나면 중상류층과 중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저소득층에게 공포와 분노를 느끼면서 정작 나라 전체의 재산과 소득을 대부분 가로채는 것은 상류층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법률 제도가 범죄로 규정하는 폭력의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이 저지르지만, 가난한 사람의 대부분은 폭력 범죄뿐 아니라 그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는다. 그리고 폭력의 피해자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다. (중략)
폭력 범죄율이 올라가면 중산층이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과 저소득층이 같은 저소득층한테 느끼는 거부감, 다시 말해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다수가 폭력을 휘두르는 소수를 자신에게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데서 오는 거부감도 커지므로 유권자를 분할 정복하기가 쉬워져서 아주 잘사는 사람에게는 유리하다. (중략)
범죄율과 폭력 발생율이 높아질수록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서로를 증오하도록 농락당하며 자기 주머니를 진짜 털어 가는 사람은 자신들 가운데 있는 비교적 소수인 무장 강도가 아니라 더 소수인 아주 잘사는 사람들과 그들을 대변하면서 돈을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손에서 최상류층의 손으로 옮기는 공화당 정치인임을 깨닫기 어려워진다. (101~104쪽)
실제로 미국 선거 중 복지 정책에 대한 증오를 유발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내 그 이야기를 유포시킨 사례가 있다. 결과는 물론 대성공. 결국 보수 집권층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패해야만 한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이게 사실이다. 복지 측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을 보라. 대북관계가 경색될 수록 보수 정권은 집권하기가 좋아지고, 또 그들이 집권하면 대북관계는 더욱 경색된다. 꼬리를 물고물며 저들의 권력 유지 기간은 더욱 길어진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민간 경제는 전혀 살아나지 않은 채 다음 선거 기간이 돌아온다. 다시 등장한 보수 정당은 실패한 전력은 지워버린 채, 다시 경제를 이야기한다. 경제가 어려우므로 이 전략은 또 다시 먹힌다. 기가 막힌 순환이다.
사회/경제적 스트레스와 중압감의 수준을 높여서 자살률과 살인율을 높이는 정책을 옹호하면서 공화당은 자신들이 공언한 번영과 치안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선거에서 이긴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보증 수표'다. (104~105쪽)
때문에 살인이나 자살은 정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죽음의 그래프가 보여주는 현상이 우연의 일치가 결코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이것을 은폐해야 하므로, 보수 정당은 '사회'를 축소시킨다. 모든 것은 개인의 잘못이거나 책임이고 사회는 그들에게 개입할 의무가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철의 여인'처럼 밀어붙인다면, 아예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이것 참 멋진 얘기 아닌가?(내가 문제를 해결할테니 표를 달라.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고? 그건 네 책임이라니까. 그 문제 해결하려고 대통령 후보로 나온 거 아닙니까. 문제가 해결 안 된다고? 왜 그렇게 남 탓만 해?)
어떻게 자살과 정치의 관계를 대중이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간 것일까? 불완전하게나마 답변을 하자면 설령 의식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분할 정복 전략이 먹혀든다는 것이다. 즉 자살과 살인을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그랬다시피 사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극구 부정하는 것이 보수 정당에게는 유리하다. (118쪽)
그러자면 자살은 정당의 정책이나 사회 조류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인의 정신 질환이나 절망감 때문에 벌어지는 지극히 사사롭고 개인적인 행위라고 우겨야 한다. (119쪽)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자살과 살인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두 사건은 완전히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같은 원인으로 발발하게 되는 경향이 많다는 점, 그리고 그 원인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집단은 이 두 사건을 계속 별개의 것으로 나누고 싶어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해낸다.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고 '우리'는. 혹은 적어도 우리 중에서 더 불행한 사람들은 자살을 한다고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살에서 폭력을 보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래서 제 목숨을 끊는 것을 정신 질환의 세계에 집어넣고 남의 목숨을 끊는 것을 범죄와 폭력의 세계에 집어넣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한다. 그래야만 두 가지 폭력 치사와 정치/경제 시스템의 연관성을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14쪽)
살인이나 자살의 원인은 복합적이고도 다면적이지만, 경제적인 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실업 같은 것. 해고 혹은 계약만료 등을 통해 실업상태로 들어선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살인이나 자살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건 단순히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치심' 때문이다.
폴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실업'이라는 말이 마치 한낱 통계인 것처럼, 결국은 커지거나 작아지겠지만 현실의 인간들과는 상관없이 그냥 흘러가는 숫자인 것처럼 말해질 때가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63~64쪽)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약하고 무능하고 모자라고 열등하면 수치심을 느끼겠는가 하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객관적으로 '사소한' 것일수록 수치심이 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 그렇다. (124~125쪽)
때문에 한 사회의 구성원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최소한의 경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게 하는, 바로 '복지'가 중요하다. 의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살인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 CCTV, 감옥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공중 보건'과 '예방 의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복지만 이야기하면 비용을 떠벌이는데, 사실 사후 치료보다도 예방이 훨씬 효율적이며 경제적이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자살률 1위니 뭐니 떠들면서 스크린 도어 만들고 옥상문을 잠그고 쇠창살을 끼워넣고. 그런다고 자살률이 얼마나 줄어들까? 무슨 이유로 저들이 죽어가는지에 대해서는 도대체 왜 묻지 않는가? 살인과 자살을 일부러 늘린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해도, 이쯤되면 방관하고 이용한다는 말을 들을만 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훨씬 강조해야 하는 것은 폭력 치사라는 전염병은 공중 보건과 예방 의학의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19세기에 우리는 청결한 식수 공급과 하수 체계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의사, 약, 병원보다 죽음을 예방하는 데 훨씬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20세기에 우리는 식중독에 걸리고 나서 치료하는 것보다 식품이 오염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이 훨씬 싸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같은 맥락에서 21세기에 우리는 자살, 살인이라는 전염병을 막고 다스리려면, 그런 전염병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불평등, 치욕, 절망이라는 병인을 줄여서 청결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런 위험 요인에 이미 노출된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처벌하는 데 우리의 한정된 자원을 쏟아붓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222~223쪽)
실제로 저자는 오랜 기간 동안 주립 감옥에서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출소 후 재범을 저지르지 않을 방안을 연구해왔다 한다. 이 연구팀이 가설로 잡았던 것은, 학부 이상의 고급 교육이 재범의 가능성을 낮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한 무상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실제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재범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기쁜 마음에 이를 제도적으로 안착시키려고 했으나 새로 부임한 공화당 주지사가 이 소식을 들었고, 며칠 후 다음과 같이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그는 며칠 안 가서 기자 회견을 열더니 이 프로그램을 없애야지 안 그랬다간 대학에 갈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이 교도소에 들어와서 공짜로 대학 교육을 받으려고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프로그램을 박살내는 데 성공했다. (115~116쪽)
그래서 저자의 "더 위험한 정치인들이 있다"는 말이 타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정치하는 놈들 거기서 거기다, 다 똑같다는 말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다른 정치인들보다 더 위험한 정치인들이 있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거나 좋은 일을 결코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이 죽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215쪽)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중 하나였던 중증환자에 대한 지원. 세금이 없어서 못한단다(담배값은 올린다지? 후후. 그러면서 줄푸세 말씀도 계속 하셨더랬지? 후후). 이 와중에 홍준표 도지사는 진주의료원을 폐지한다. 비효율 때문이란다. 사람목숨이 돈보다 중요하지 않느냐는 온정주의 혹은 대의의 차원에서 이야기할 것도 아니다(솔직히 저들에게 먹힐 거 같지도 않고). 오로지 효율만을 따졌을 때조차, 복지가 답일 수 밖에 없다. 아, 물론 돈 없으면 죽어야지 뭘 시끄럽게 떠드냐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슬프게도 한국에서는 '그들이 나쁜 사람이거나 좋은 일을 결코 하지 않아서' 위험한 정치인들이 있다. 그것도 많이. 그것도 꼭대기에. 저자가 인용한 루돌프 피르호의 말은 의사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정치가 규모를 키운 의학이라면, 정치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사의 소양을 갖춰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그런 소양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 이렇게 된 건, 정치하는 놈들이 다 똑같아서가 아니라 똑같다고 이야기하며 조금의 차이조차 눈여겨보지 않은 우리의 탓이다. 개인의 탓으로 돌려야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부분이다.
의학의 진보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겠지만 사회적 여건의 개선은 이러한 결과를 더 신속하게 더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 (바로 그래서) 의사는 본디 가난하나 사람의 변호인이고 사회 문제는 넓게 보면 의사의 영역에 들어간다. 인간을 다루는 과학으로서 의학은 사회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중략) 의학은 사회과학이고 정치는 규모를 키운 의학일 뿐이다. (225~226쪽)